「남북정상회담」을 생각한다/유석춘 연세대교수·발전사회학
(시론)
 
바야흐로 남북간의 정상회담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다.최근 한 기업인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와 풀어놓은 보따리에는 경제협력에 관계된 합의사항 뿐만 아니라 정상회담에 관한 고도의 정치적인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남북의 정상회담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는 비단 이번 경우를 통해서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지난해의 유엔 동시가입과 비핵화 공동선언에 대한 합의는 이를 위한 한반도 내부의 기본환경을 정지한 것이었다. 또한 연초 정부 각 부처의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는 남북간의 협력 및 통일에 대비한 계획이 주류를 이뤘다.한편 북한은 핵협정에 곧 서명할 것으로 알려졌으며,미국과도 고위급 회담을 통해 관계개선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이른바 「객관적」여건이 성숙되어 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북의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이는 분명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지난 반세기동안 남북의 당국간에 전혀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정상회담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해 왔던 구조에서 이제는 서로를 최소한 대화의 상대방으로,즉 친구로 인정하는 구조로의 전환을 공식적으로 의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산가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해방이후 태어난 세대에게는 차단되었던 민족의 절반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정상회담은 남북의 협력을 통해 한민족이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정상회담은 또한 낭비적인 남북간의 군비경쟁을 종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예측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정상회담은 우리민족의 미래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추진할 때에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소위 「객관적 여건」이 과연 정상회담을 위해 충분한 것인가를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현재 남북간의 현안이 되고 있는 핵사찰문제는 북한이 협정에 서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실시시기가 기술적 절차적 이유로 인해 지연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또한 「객관적 여건」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한국과 중국의 수교문제도 북한과 미국,일본과의 관계개선과 연계되어 있다.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군사동맹및 국제협력 관계는 구질서가 무너지고는 있으나 아직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고 있지는 못한 것이 현실이다.이러한 때에 분명한 이해관계의 득실을 헤아리지 않고 감정과 분위기에 이끌려서 무작정 남북의 정상이 손을 잡게 할 수는 없다. 현재 북한은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다고 한다.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근대국가에서는 처음으로 정치권력의 부자간 승계를 시도하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내부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북의 정상회담을 이용할 필요성을 계산하였는지도 모른다. 한편 남한의 입장에서도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계산이 나올 수도 있다.즉 남북간의 경제협력이 정상회담에 의해 물꼬를 트게되면 남한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국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고,이는 곧 다가올 총선에서 집권당의 득표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요즈음 이러한 남북한 당국의 정상회담에 대한 「주관적 동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북한의 권력승계와 남한의 당리당략이 맞물린 결과로 아무런 실질적인 남북관계의 개선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정상회담이 될 것이란 걱정이다. 물론 정상회담의 결과는 민족의 앞날에 장기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남북한 당국이 정상회담이 가져다 주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여 장기적 효과에 대한 고려와 평가를 충분히 하지 않고 이를 추진한다면 그 결과는 결국 민족을 기만하는 사술로서 기억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맹이 없는 남북간의 접촉에 여러번 속아 본 쓰라린 경험이 있다.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고,정치적 행위는 도덕적이고 당위적인 기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행위에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침투하였다고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오히려 정치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철저히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정상회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이로부터 우리가 얻어낼 것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북쪽의 권력승계 문제에 정상회담이 이용만 당하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는 경우에 철저히 대비하여야 한다. 또한 남쪽의 당국이 정상회담을 총선용의 일회성 사건으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감시와 요구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정치권은 이러한 감시기능을 전혀 작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밀실공천이라는 늪에 빠져 남북관계의 전개에 관해서는 국회의원 어느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지금 어느 국회의원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정부에 적절한 대책을 요구하고 감시역할을 하려 하고 있는가를.
( 1992/01/30 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