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3-03-24 00:00
 
문민시대의 사회운동/유석춘(동아시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재야 운동권을 거의 망라한 연합체인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은 며칠전 치러진 대의원대회에서현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앞으로 대규모 군중시위 및 집회를 지양하고 공청회 등 다양한 대중운동을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그동안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던 학생운동권도 정치투쟁 위주의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조직을 포기하고 학생복지와 교육환경개선에 주력하는 「전국총학생연합」(전총련)으로 탈바꿈하기로 결의하였다고 한다.

○고무적인 재야변신

이러한 변화는 군사혁명이래 피할 수 없는 굴레로 존재하여 온 정통성시비가 한국정치에서 근본적으로 해결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군사정권의 억압적 통치에 정면으로 저항하던 이들 운동권이 이제는 그 저항의 명분을 찾을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다.

노태우정권의 절차적 민주화채택과 김영삼정권의 실질적 민주화 추진은 이제 민주화를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시대의 정신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민주화란 여러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게임에 참여하는 집단이 모두 동의하는 규칙에 대한합의라고 보면 큰무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동의된 규칙이 지켜지는 한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다고하여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할수 없다. 과거의 운동방식과 과거의 대응방식이 청산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과거의 운동방식과 대응방식이 가져다 준 희생을아직도 너무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그리고 최루탄과 고문에 쓰러져 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없다. 그들의 희생을 딛고서야 비로소 오늘의 민주화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학원은 혁명의 기지가 되어 학생들의 자치공간에는 책대신화염병이 줄을 맞춰 쌓여 있었고,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는 커녕 행인을불심검문하고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민중의 감시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낭비를 비용으로 지불하고서야 민주화는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변화를 가능케 한 조건은 여러가지다. 내부적으로는 30여년의 고도성장에 동반하여 등장한 거대한 노동자 집단의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고,외부적으로는 냉전체제에 기초한 국제질서가 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갑작스런 몰락으로 해체되면서 북한의 고립화가 이루어졌다. 성장의 논리와안보의 논리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고,그에 기초한 지배의논리는 밑바닥부터 침식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균열을 배경으로 민주화를 성취하는데 일정한 기여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절차적 민주화를 거쳐 실질적 민주화의시대가 열리고 있다. 고위 공직자의 재산목록이 공개되어 재산형성과정의도덕성을 여론이 심판하고 있다. 정치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의지지정도에 의존한다. 현정권은 집권절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집권후의국가운영에 있어서도 현재까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문제가 없어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선거과정에서 기득권층과의 야합이라는 비난을 퍼부으며 김영삼후보에 반대했던 재야 및 학생운동권조차 새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현실에서 명확히 확인될수 있다.오히려 온국민은 새로운 정권이 진행하고 있는 위로부터의 개혁의 신속함과 포괄성에 놀라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거리운동시대 끝나

이러한상황에서 과격한 사회운동의 방법이 적절하지 않음은 명백하다. 따라서최근 재야운동권이 대중의 정서에 맞는 운동방법을 모색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여겨진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감시하고 보완하는 방법은 거리에서의 「견인에 의한 타격」전술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성실히 직분을 다하며 주변의 부조리를 스스로 개혁하고 감시하는 노력을기울이는 것이다.

최근 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이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를설치한 것이나,서울YMCA가 부정비리고발센터를 시민권익변호인단의 도움을 얻어 운영하고,또한 부패척결을 위한 시민논단을 개최하는 노력 등은 앞으로의 사회운동이 지향할수 있는 운동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주목할만한 현상이라 여겨진다.

시위를 위주로 한 거리에서의 운동은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최근 김대통령의 광주방문과 관련한 사건은 그래서 대부분의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의 억압적 지배를배경으로 자라온 사회적 갈등과 반목을 치유하는 데에는 그만큼의 노력과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해결의 방법이 민주적이지 못하다면 우리는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고리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게 될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노력이 민간단체의 공청회나 토론회 등을 통해 꾸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루어 질때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민주적 사회운동은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다.<연세대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