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논쟁 이젠‘식상한 선거 메뉴’

젊은세대 전면 등장…과거 투표행태 변화조짐 뚜렷

    리나라 선거의 쟁점에는 반드시 「색깔논쟁」이 포함되어 왔다.

누구는 「빨갛다」 혹은 「불그스레하다」라는 낙인이 선거에 미치는 효과는 가히 치명적이었다. 분단이라는 비극이 안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좌와 우」라는 사상적 색깔을 어쩔 수 없는 정치의 「아킬레스 건」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좌우대립이 가져다 준 상처의 깊이와 폭은 지구상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그 범위와 정도가 약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 민족이 좌우 대립에 보여주는 본능적 거부감을 지나치다고 탓할 수 없다.

지주와 머슴이 하루아침에 정치적 위상을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위치를 바꾸며 갈등한 나라가 지구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남과 북이 서로의 이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알레르기 반응은 너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변화가 일고 있다. 분단이라는 현실이 우리 사회를 조건지워 놓았던 이데올로기의 대립구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혹은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권의 「붉은색 칠하기」에도 불구하고 제1 야당의 대통령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계속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 연일 보도 되고 있다.

「원조 보수」라는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며 대통령선거에 임해왔던 제2야당의 군 출신 후보는 같은 상황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면 북풍의 영향으로 반사이익을 가장 많이 누려야 할 집권 여당의 대통령후보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인기를 만 회하지 못하여 급기야 여당 내부에서조차 「말」을 갈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두 아들의 「병역」이라는 분단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희생을 「법대로」치르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은 후보이니 북풍의 반사이익을 기대 하기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색깔논쟁이 초래해왔던 지금까지의 투표행태가 이번 선거에서도 반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익제씨의 월북이 몰고온 파장이 또 한번 북풍을 일으키며 한국정치의 「우(右) 편향」을 굳건히 담보할 것이란 예상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황장엽 리스트가 12월 대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측이 함축했던 색깔 정국의 도래와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의 호재 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파괴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를 이 상황에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 사회 정치현실의 구조가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거 정권에서 여당 후보는 군부와 공안당국의 막강한 협조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선거를 치렀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군과 공안당국이 여당 후보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상황이다. 북풍이 강해질수록 여당 후보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풍의 반사이익은 오히려 제3의 야당후보에게 돌아가고 있다.

南北 경제력 격차 등으로 ‘붉은색 공포’퇴색

이러한 정치현상의 배후에는 보다 근본적인 경제사회적 변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분단의 아픔을 직접 체험한 세대는 이제 고령인구로 밀려나고, 연령구조의 핵심에는 고도성장의 수혜자 집단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실리를 좇는 이 집단은 수교 5년만에 사회주의 중국을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부상시키며 투자를 주도하고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냉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환경이 이 집단의 활동에 호의적임은 물론이다.

또한 이 집단은 북으로부터의 위협이 기성세대가 교육했던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알고 있는 세대다. 남북간 의 뚜렷한 경제적 격차를 이들은 세계화를 통해 매일매일의 정보로 확인할 수 있으며, 북한의 인권문제와 식량문제의 실상을 인터 넷을 통해 검색할 수 있다.

동시에 남북합작의 경수로 건설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동원하고 제공하는 역할도 바로 이 세대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이 새로운 한국사회의 주역 집단은 「붉은색 공포」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조건, 즉 「주관적 능력」과 「객관적 기회」라는 두가지 차원의 조건을 모두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정치현상의 배후에 이러한 사회 경제적 구조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붉은 색 공포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구조적 변화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과정이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첫번째 기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 석 춘<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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