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분야 : 피플/칼럼
등록 일자 : 1997/10/09(목) 20:49
 
[특별기고]유석춘/정치자금 폭로 「진흙탕 싸움」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야당의 김대중(金大中) 후보에게 집권여당이 드디어 칼을 휘둘렀다. 엄청난 규모의 검은 돈을 관리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검찰이 수사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다. 정치권은 경악하였고 국민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국민회의 측의 대응도 강경하여서 둘 중 하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 검찰 수사 불가피 ▼

검찰이 이 문제를 우회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문제를 제기한 쪽이 상당히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법적인 판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의 추이도 검찰의 명명백백한 수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목말라 하고 있다. 이번 폭로를 계기로 또 한번의 대형비자금 사건이 정치권을 강타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본적으로 이번 폭로 사건은 해방 후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우리 정치의 관행과 현실이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모순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두 전직 대통령 그리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의 비자금 사건과 동일한 맥락에서 불거져 나온 사건이다. 고비용 정치구조가 존재하는 한 누가 집권하여도, 그리고 누가 야당을 하여도 한국의 현실에서 정치를 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원죄」와 같은 측면이 이번 사건에도 내재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법적 처리를 둘러싸고 나타날 수 있는 형평과 타이밍의 어려움이다. 형평성의 기준에서 우리는 부정과 부패의 의혹이 구체적으로 발견된 이상 어떤 경우라도 그 문제를 덮어 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철저한 수사와 법의 심판이 뒤따라야 한다. 두 전직 대통령과 김현철씨를 감옥으로 보낼 때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당위를 내세우며 경종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국민회의 측은 다른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하다. 92년 대선의 당사자인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비자금은 왜 문제삼지 않느냐는 논리를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연성은 있어도 구체적인 증거가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차별성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국민회의 측이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구체적인 증거를 수집하여 또 한번의 역폭로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선정국은 대폭발을 감수하며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 유권자 바른선택 절실 ▼

한편 이번 사건의 타이밍은 더욱 미묘한 부분이다. 대선을 두달여 남긴 시점에서 집권당의 후보가 열세에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로 예정된 선거일까지 이 사건에 대한 법원의 최종적인 판단은 고사하고 검찰의 수사라도 일단락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따라서 국민들은 자신의 소중한 투표권 행사에 참고할만한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받을 수 없게 된다. 그때까지 국민들은 아전인수격인 정치권 선전과 선동만에 노출되고 말 것이다.

형평성과 타이밍이 제기하는 어려움이 클수록 이번 사건이 일반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밀실에서의 정치권 야합을 통해 흐지부지 마무리될 공산 또한 크다.

유석춘 (연세대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