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착란」에 빠진 한국 정치/유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
(시론)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상대방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헷갈리 는 것을 두고 우리는 「역할착란」이라 부른다.

사회적인 혼란이 심각 할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다. 80년대 말 대학이 몸살을 앓을 때 학 생이 교수의 머리를 삭발한 사건을 기억하면 이 사례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대선정국 혼미… 국미들 당황

요즈음 대선 정국이 혼미해지면서 정치권에도 역할착란이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 어 국민들을 당황케 하고 있다.

우선 광복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여야의 역할이 뒤바뀌고 있다. 거액의 정치 비자금에 대한 폭로전 을 여당이 진행시키고 있고,야당은 이를 피해가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

또한 비자금의 제공자로 항상 지탄받아온 기업과 재계는 「보험료」 를 까발리는 집권 여당에 불편한 심기를 거침없이 내보이며 야당과 함께 「오리발」 작전으로 일관하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경 유착의 새로운 모습에 국민들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대선정국의 역 할착란은 비단 여야 사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시녀」라 는 오명을 받아오던 검찰이 대통령의 아들을 비자금사건으로 구속하고 급 기야는 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아낸 일을 두고,미국의 유력한 일간지는 한 국에서 법치가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라며 극찬했다. 그런데 같 은 시간 같은 장소의 같은 검찰은 야당 총재의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 「묵묵부답」과 「마이동풍」으로 일관하고 있다.

비슷한 성격의 사건을 서로 다른 잣대로 평가하는 검찰의 이중성에 우리는 일종의 착란현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착란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예는 여기서 끝 나지 않는다. 두 전직 대통령과 김현철씨의 비자금사건이 불거졌을 때 한국의 모든 언론은 이를 심판하여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 야 한다고 「합창」하였다.

○여 「정치적 무능력」서 파생

경제가 어 려워지니 사건을 덮어 두어야 한다는 말은 아예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 그러나 불과 수개월의 시차를 둔 지금 언론의 지배적 논조는 경제를 염려하느라 비자금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 다. 국민들이 착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이런 역할의 총체적 착란현상을 가져오고 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집권 여당의 「정 치적 무능력」 때문이다. 여당의 무능력은 역설적이게도 대선후보의 「경 선」이라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도래한 현상이다.

참신한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번 여당의 후보 경선과정은 그것이 반드시 보장해야 할 대통령 후보의 「자격검증절차」라는 기준에서 전혀 기대에 어긋난 실패작이었다.

본선의 경쟁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없 었던 「찻잔속의 태풍」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시비」라는 바 깥의 태풍은 「온실」 속에서 선출된 후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치명상을 안겨준 것이다.

여당 후보가 본선에서 휘청거리며 재집권의 가능성이 불투명해지자 역할착란은 시작되었다. 우선 경선에서 2등을 한 후보가 1등을 한 후보에 승복하지 않고 독자출마를 선언하였다. 민주주의의 기본절차를 위반한 반칙이라는 여론의 집중적인 폭격에도 불구하고 2등 한 후보는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차선의 선택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반칙으로 퇴장당해야 할 사람에게 관중석은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헷갈리는 일이다.

○유권자들 냉철한 판단 필요

누구나 논리적인 차 원에서는 여당이 야당이 될 수 있고,또 역으로 야당이 여당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득권을 가진 집단은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역으로 잃을 것이 없는 집단은 변화를 원한다.

따라서 안정을 바라는 집단과 변화를 바라는 집단은 필연적으로 충돌한 다. 특히 대선국면과 같은 이행기에는 이러한 충돌이 더욱 증폭된다. 충돌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깊어질수록 역할착란은 강화된다.

정치의 혼란이 불러온 역할의 착란을 보며 우리 모두는 이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다. 두달 후로 다가온 선거의 결과가 올바른 선 택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역할의 착란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가져야 할 때이다.

( 1997/10/17 0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