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분야 : 피플/칼럼
등록 일자 : 1997/11/04(화) 19:54
 
[특별기고]유석춘/설탕과 물…기름과 물
 
설탕과 물을 섞고 흔들면 설탕물이 된다. 그러나 기름과 물은 아무리 섞어 흔들어도 기름물이 되지 않는다. 잠시 시간이 지나면 기름은 기름대로 물 위로 뜨고 물은 물대로 기름 밑으로 가라앉는다.

반면에 완전히 용해된 설탕물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설탕과 물로 분리되지 않고 설탕물로 남는다. 물질의 화학적 성분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이치다.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이 내각제를 고리로 연대하여 한국의 21세기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보도가 언론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또 하나의 「구국의 결단」이 탄생한 모양이다.

그러나 정당의 이합집산에 이골 난 우리 국민의 눈이 이번 「구국의 결단」을 지금까지의 이합집산과는 다른 모습의 「정당간 연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 DJP연대를 보는 눈 ▼

오히려 국민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은 정치적 「야합」이라는 의심이 팽배한 것이 현실이다.

「DJP연대」로 불리는 새로운 정치적 흥정의 내용은 「내각제」가 다가오는 12월 선거의 주요 쟁점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예고하고 있다.

「3김청산」 「정권교체」 「세대교체」라는 지금까지의 대선 쟁점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새로운 쟁점을 추가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은 변화의 「양」을 기준으로 한 부등식, 즉 「정권교체〈3김청산〈세대교체」에 추가하여 변화의 「질」이라는 부등식, 즉 「내각제냐 혹은 대통령제냐」라는 선택에도 나름의 판단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각제」라는 명분 뒤에는 「DJT」라고 불리는 지역간의 권력연대 가능성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현상인 지역갈등을 치유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선정국을 이끌어온 「정권교체」 「3김청산」 「세대교체」라는 구호는 모두 지역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각제」라는 새로운 대선의 쟁점은 지역문제의 해소를 「지역간의 권력분점」으로 해결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내포하고 있다.

▼ 「물리적 결합」은 안된다 ▼

「DJP연대」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결합이건 혹은 지역간의 권력 나눠먹기이건 간에 국민은 그것의 화학적 결합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3당통합을 통해 탄생한 김영삼(金泳三)정권이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핵분열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각제」라는 권력구조를 매개로 대선국면에서 급작스레 이루어진 「DJP연대」가 국민에게 물과 기름의 물리적 결합으로 비쳐질지, 혹은 물과 설탕의 화학적 결합으로 비쳐질지는 오직 이번 대선의 결과가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일 한가지는 국민이 물리적 융합에는 이미 식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DJP연대」가 「설탕」과 「물」의 화학적 결합으로 판단되지 않고 「기름」과 「물」의 물리적결합으로 판단되는 한 「내각제」라는 접착제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국민은 「DJP연대」를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각제라는 권력구조의 「질」을 구성하는 두 물질, 즉 「국민회의」와 「자민련」, 그리고 「김대중(金大中)씨」와 「김종필(金鍾泌)씨」의 화학적 결합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이제 대선국면을 맞이한 국민의 최대 관심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유석춘(연세대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