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유석춘 연세대 교수 사회학
(시론)
 
온 나라가 침통해 하고 있다. 「시일야방성대곡과 같은 국치를 당한 것으로 국민은 받아들이고 있고,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은 이런 분위기를 앞장서 확산시키고 있다. 하기야 미국의 조정을 받는 국제통화기금(IM F)에 앞으로 3년간 경제정책을 미주알 고주알 협의하고 허락을 받았으 니 경제주권을 빼앗겼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뼈 빠지게 일한 국민 날벼락

언론들이 전하는 한국정부와 IMF간의 협상 과정 또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우리 국민은 정부가 숨기려 했던 국가의 부도위기 정보를 IMF측의 공 개에 의해 알게 되었다. 구제금융에 관한 실무진의 협상결과를 양측 최 고책임자가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수모를 당하였다.

온 나라가 「세계화」를 한다고 법석을 떨더니 결국 한 일이란 우리나라의 국무회의 를 국제통화기금의 총재 밑으로 편입시킨 일 뿐이었다. 그 결과 대선 후보들은 집권을 해 보기도 전에 운신의 폭을 저당잡혀야 했고,열심히 일해서 저축한 국민은 돈 떼이고 실직당할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누 구의 잘못인가.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 지경으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경제적 성공을 평가할 때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요소를 한가지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매우 능률적인 경제관 료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일을 계획하 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이들 관료가 제공한 역할은 다른 어느 국가와 비 교하여도 독보적인 것이었다. 이들이 한편으로는 「시장경제를 수용」하면 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산업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제 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능 경제관료 자리 떠나라

「시장경제 유지」와 「국내산업 보호」 라는 두가지의 정책적 목표는 「수출주도산업화」라는 보다 구체적인 전략 으로 결집되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수단이 하나하나 제공되면서 엄청 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경제관료는 이 전략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정적 지원과 결정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래서 경제적 동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치금융」이라는 금융정책 그리고 「재벌 육성」이라는 산업정책은 모두 수출을 위한 관료집단의 선택이었다. 그리 고 그 결과는 샴페인을 터뜨려도 좋을 정도의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으로 자동 연결될 수는 없다. 우리 경제관료 집단은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국내외의 변화된 상황에 적절 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국내적으로 재벌은 이미 육성의 대상으로 남아있 지 않았다. 정부가 육성하지 않아도 이들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온갖 새 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공룡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재벌을 과거와 같은 특혜금융으로 뒷받침해 줄 까닭이 없었다. 재벌 스스로도 오히려 정부가 방해만 하지 말아달라는 형국이었다. 국제적으로도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출발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국내산업에 대한 특혜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과거와 같은 경제정책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임 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관료는 이러한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앙은행의 손발을 잘라 내고 재경원을 키우는 일에 매진하였다. 기업의 자율성을 제고하여야 할 시점에서도 우리 경제관료는 재벌의 「배째라」식 요구에 끌려다니기만 하였다. 「경쟁력」보다는 「애국심」에 호소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보겠다는 자세 자체가 WTO체제라는 시대조건과는 맞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이었다.

○3류정치판 구조조정해야

그런 의미에서 이번 IMF의 구제금융 조건은 오히려 우리 경제의 자율성과 탄력성을 확보할 수 있 는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주고 있다. 재벌에 끌려다니고 노조에 끌려다니며 앞뒤가 맞지 않는 경제정책을 수시로 발표해 온 우리의 경제관료는 이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 주어야 하는 정치권의 변신이다. 「챙기는 관료」가 존재할 수 있도 록 해 주는 정치권의 지도력이 절실하다. 이도 저도 안되면 마지막으로 정치권을 개방하여 「구조조정」을 해야 할 판이다.

( 1997/12/06 0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