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재벌은 국민과 공동운명체 .. 유석춘 <교수>
 
 
게재일: 1998-12-07
한국경제신문(칼럼)
 
 
 
유석춘 < 연세대 교수. 사회학 sclew@bubble.yonsei.ac.kr >

우리 사회에서 재벌은 무엇인가.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으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TV를 볼 때까지 우리는 재벌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살아간다. 이를 닦는 치약에서부터 입고 있는 옷은 물론 출.퇴근에 사용하는 자동차와 퇴근후의 모임에서 마시는 음료, 그리고 살고 있는 주택까지 모두 재벌이 생산한 물건들이다. 재벌과의 관련은 의.식.주를 둘러 싼 소비생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영역에서 필요한 일자리 또한 상당부분 재벌이 제공한다. 해마다 학교교육을 마치고 졸업하는 신규인력의 최우선 순위 입사희망 대상은 물론 재벌회사다.
재벌은 우리와 분리돼있지 않다. 표준적인 한국인이라면 재벌과 어느정도는 공동운명체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경우에 따라 그 관계는 일자리를 제공받는 노동자의 모습일 수도 있고 거꾸로 주식을 소유하는 자본가의 모습일 수도 있다. 중소기업을 하는 경우라면 재벌은 거래처일 수 있다. 또한 공무원인 경우라면 재벌은 규제 및 탈규제의 대상이 되는 행정서비스의 중요한 고객이며, 은행 또한 대출과 예금 업무에 재벌은 없어서는 안될 절대 적인 존재이다. 누구나 가까운 친족가운데 최소한 한두사람은 재벌회사와 특별한 관련을 맺고 살아 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재벌이 이와같이 우리의 경제생활은 물론 일상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게 된 배경에는 물론 지난 40년간의 산업화 과정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주도의 급속한 경제개발이 재벌을 키워온 것이다. 우리는 재벌에 특혜를 제공하고 수출을 하라고 요구했다. 수출하지 못하면서 특혜를 얻어 가는 재벌은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수출 잘하는 재벌은 특혜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해외의 고속도로에서 우리의 자동차를 만나고 세계 유명 백화점에 진열된 우리의 가전제품을 보면서 우리는 재벌을 자랑스러워 했다. 전 세계의 공항에 깔아 놓은 한국 재벌의 짐수레는 우리의 자존심을 드러 내는 상징이 되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수출중심의 경제발전 전략과 이에 따른 재벌 중심의 경제 체제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가 발전을 주도하는 특징으로 인해 우리 경제는 개입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해외지향적 생산으로 인해 우리경제는 지나치게 규모의 경제를 키워왔다는 지적도 받았다.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로 인해 한국은 정경유착이라는 고질적 병폐를 갖게 되었다는 비판도 끊이질 않았다. 재벌의 기업경영이 관련부문은 물론 비관련부문에까지 문어발식으로 확대 되면서 차입에 의한 선단식 경영의 폐혜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작년말부터 시작된 IMF의 개입을 계기로 모두 우려가 아닌 현실로 드러나 버렸다.
재벌은 개혁돼야 한다. 12.7 재벌개혁의 밑그림도 그래서 그려진 것이다. 그 개혁의 속도와 범위 및 규모가 충분한 검토를 거쳤느냐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탐욕의 화신으로 비난하며 막무가내로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 경제의 밑그림을 모두 지워 남미와 같이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종속적 이고 주변적인 경제로 가는 비극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한국이 종속이론의 예외적인 사례로 등장하고 나아가 신흥공업국의 선두자리 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재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벌이라는 경제주체에 일정한 역할을 맡기고 국가로 하여금 재벌이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하며 발전해 왔다. 물론 재벌에 맡긴 역할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수출이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성장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이 수출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재벌 개혁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은 바로 어떻게 하면 재벌에 수출경쟁력을 확보해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돼야 한다. 재벌이 수출하지 못하면 한국 국민 모두가 망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