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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전통 없이 보편적 가치도 없다
 
발행일 : 1999-03-16 [문화]
기자/기고자 : 이준호
 

인문사회과학계에서 학술계간지 「전통과 현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 진보도 아니고 딱히 보수도 아니면서 첨단이 판치는 마당에 「전통」이라는, 철지난 듯한 화두(화두)를 들먹인다 . 게다가 그 동인 대부분은 유학파이다 .

지난 11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음식점 . 학술 계간지 「전통과 현대」 동인들은 갓 출간된 99년 봄호를 받아들고 창간 이래 볼수 없는 감회에 젖었다 . 내부 사정으로 작년 겨울호가 못나왔으니 사실상 재창간호나 다름없었다 . 작년 9월 「전통과 현대」 산파 중 한사람인 황인하(당시 대우자동차 부장)씨가 숨지면서 한때 소강상태에 빠졌던 이 모임이 새출발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

97년 창간된 「전통과 현대」는 민주화 운동 세력과 외국 유학파의 기이한 만남으로 시작됐다 . 서울대 사회학과 77학번으로 운동권에 깊이 관여하다가 대우그룹에 입사한 황인하씨가 어느날 연세대 함재봉 교수를 찾았다 . 『한 사회를 뒷받침할 사상이 없는 한 운동도 모래성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 마르크시즘도 외래사상에 불과했다 . 30대들에게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을 찾아달라 . 』

함교수(연세대·41·정치학)를 비롯, 유석춘(연세대·44·사회학), 김병국(고려대·40·정치학), 이승환(고려대·43·철학), 유홍림(서울대·38·정치학), 김석근(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40), 김형철(연세대·철학·40), 김문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 구사·37), 장현근(용인대·중국학·36)씨 등이 모였다 .

출발 당시 모임은 과거 고위관료 자제들이 주도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 유석춘(박정희대통령때 청와대 정무수석 유혁인씨 아들·일리노이대 박사), 함재봉(아웅산에서 순직한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씨 아들·존스홉킨스대 박사), 김병국(인촌 김성수 선생 손자·하버드대 박사)교수 등은 민주화운동이 거셌던 80년 대초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 이들은 전통사상 복원에서 우리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화두를 들고 돌아왔다 . 90년대 초반까지도 중도를 표방하기조차 힘든 학계 분위기였다 . 이들은 좌파들로부터 보수 우파라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떳떳했고 견지를 굽히지 않았다 .

『「보편」이라는 미명하에 수입된 서구이론들은 한국사회의 특유한 동인(동인)들을 밝혀주는 데 실패했다 . 이제 전통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가운데 한국의 특수성에 기반을 둔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해야 할 때다 . 』 편집주간 함 교수는 창간호 서문에서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만남」을 선언했다 .

이들은 「유교와 21세기 한국」, 「한국전통사상과 자본주의」, 「다문화주의 시대의 전통문화」, 「전통교육과 현대교육」, 「한국민간신앙의 저력」 등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 「수입학문」이 판치던 상황에서 이들이 제기한 「유교 자본주의」 패러다임은 창간호가 5천부나 팔릴 정도로 학계의 눈길을 끌었지만 비판도 뒤따랐다 .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냐』는 반발이 많았고, 이들의 출신배경까지 들먹이는 경우도 있었다 .

imf를 맞아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비판이 나도는 상황에서 이들은 옹호측 견지에서 논쟁을 주도했다 . 『경제위기는 투기적 금융자본의 교란에 의한 것일뿐 아시아적 발전모델은 유효하며 오히려 위기에 처한 세계경제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수 있다』면서 『인본주의, 공동체주의, 가족주의, 교육 숭상 등 아시아적 가치가 세계적 보편적 가치가 될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들은 요즘 「유교 민주주의 선언문」 작성에 힘쓰고 있다 . 경쟁에 입각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대안(대안)으로 유교적 가치를 제도화하자는 움직임이다 . 빠르면 올해안에 한국이나 워싱턴에서 국제회의를 열 계획이다 .

서구 개념을 사용해 서구인만큼 유창한 영어로 유교적 가치를 설명할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또다른 강점이다 . 『다들 민주화운동을 할 때 유학을 갔다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 그 빚을 갚기위해 대중에 더 다가가고 현실에 뿌리를 대려고 애쓴다 . 』 이승환 교수의 말은 다른 동인들에게도 적용된다 .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패러다임이 아직은 가설단계라는 자평(자평)을 잊지않는다 . 진보와 보수, 한국과 세계, 아카데미즘과 현실이란 복잡한 함수 속에서 제자리를 찾으려는 이들의 고민은 곧 새로운 세계를 앞둔 우리 학계의 고민이기도 하다 .

☎(0344)906-8423 /이준호기자 jun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