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분야 : 정치
등록 일자 : 2000/06/16(금) 17:16
 
[북한문화 충격 이렇게 본다]긍정론-경계론
 

《‘북한’이 하나의 문화기호로 떠오르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우리사회 곳곳에 북한 관련 상품이나 화제가 흘러 넘치고 일각에서는 급기야 ‘김정일 현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문화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의 긍정적 측면은 무엇이며 경계해야 할 측면은 무엇인가. 시각의 차이를 지닌 두 학자의 글을 싣는다》

▼긍정론▼

‘김정일 충격’. 그것을 어떤 사람은 쾌활함, 친근함의 이미지가 주는 긍정적 충격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동안의 무서운 가면이 다른 가면으로 바뀐 데 따른 혼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무겁고 괴팍한 이미지가 깨지는데서 오는 충격이라는 점. 그래서 그런 경쾌하고 친근한 이미지에 대한 호감에 우려를 금치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호 불호나 쾌 불쾌, 혹은 친근감 등과 같은 감정에 대해 찬반을 표시하거나, 그것에 대해 우려와 비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폭력인가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김일성이 잘 생겼다는 사실에 놀라 그걸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라의 안위를 보호하는 법에 저촉되던 시절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은 언제나 못생기고 괴팍하며 무시무시한 인상에 성질 더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강요하려 한다면, 그래서 ‘적’의 새로운 모습에 “속지 말자”고 고집하려 한다면, 앞으로도 저 충격은 거듭해서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이 이미지 조작이므로 그것에 “속지 말자”고 하는 주장은 이런 고집에 ‘과학적’ 논리를 제공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미지 ‘조작’없는 정치는 없다. 방송과 언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현대의 정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조선시대 성군의 이미지나 루이 14세의 ‘태양왕’ 이미지도 사대부나 궁정 귀족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연출된 것이다. 루이 14세의 경우에는 똥을 싸는 행위까지도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이용됐다. 상품을 팔기 위해 일상적으로 이미지를 ‘조작’하고 만들어야 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미지 조작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는 굳이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차라리 중요하고 현실적인 것은 대체 어떤 이미지를 만드는가고, 그 이미지를 통해 어떤 효과를 얻으려는가가 아닐까? 여기서 나는 ‘김정일 충격’이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가 아니라 반대로 가볍고 쾌활한 이미지, 호탕한 이미지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무겁다는 것은 현재의 자리, 현재의 적대, 현재의 지배적인 현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가볍다는 것은 쉽게 떠날 수 있음을 뜻한다. 정상회담이 현재의 현실, 분단과 상호적대, 혹은 그로 인한 각각의 억압과 통제 등을 떠나려는 것이라면, 더불어 남북의 ‘인민’들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과 적대감을 덜어주려는 것이라면(이게 아니라면 대체 그런 회담은 뭐하러 하는 것일까? 이게 아니라면 통일은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좀더 가벼워져야 한다. 서로의 만남에서 기쁨과 유쾌함을 느껴야 한다. 진지함이 무거움은 아닌 것이다.

박태호(사회학박사·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경계론▼

이번 방북의 성과는 공식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비공식적인 측면에서 더욱 큰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남북간 당국자의 모임에서 주고받은 인사말이 제공했던 편안한 느낌을 우리 국민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의 ‘잠자리와 밑반찬을 걱정’하는 모습, 그리고 ‘은둔에서 나를 구해 준 김대통령에게 감사한다’는 표현이 생중계를 통해 가감없이 전해지면서 남과 북 모두 한민족공동체로서의 유머감각과 정서의 공유를 재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기회가 ‘철혈 독재’로부터 ‘인간의 얼굴도 있는 체제’로 북한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의 변화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남북의 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가 접할 수 있었던 이미지들이 지금까지의 ‘뿔 달린 빨갱이’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평양시내를 가득 메운 시민의 환호와 함께 등장한 ‘같은 색깔과 같은 크기의 조화’, 그리고 이를 ‘같은 방법으로 흔드는 획일화된 흥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방북은 잠바 차림의 ‘텔레토비’와 같은 지도자의 모습을 우리가 어떤 범주로 인식해야 하는지의 문제도 숙제로 남겨주었다. 김정일이 빠진 김영남과 김대통령의 회담은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숙제이기는 마찬가지다. 방북일정의 지연이 남측의 급작스러운 요청을 북측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결과라는 해명 또한 의구심을 늦출 수 없도록 하기는 매 한가지다.

방북 이후 북한을 소재로 한 광고나 유머가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휘파람’이나 ‘반갑습니다’와 같은 북한 가요의 음반판매가 상승하고, 심지어는 ‘김정일 팬클럽’을 결성하겠다는 학급이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방북이 제공한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는 과정이 순조롭고 부드럽기를 기대하는 일은 오히려 섣부른 주문으로 판가름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마치 조선을 배경으로 한 인기 TV 드라마 ‘허준’을 보고 과거 우리 민족의 올곧은 생활을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반추하였듯이 북한이 보여 준 환대의 이면에 숨겨진 북한 주민의 현실을 보고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화의 그늘’을 체감할 수 있다면 이번의 충격은 오히려 ‘입에 쓴 약’이 될 수 있다. 탈근대가 요구하는 해체의 대상으로 전근대의 북한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이 아프게 다가올 뿐이다.

유석춘(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