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사회 칼럼]세계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인가?


유석춘
 


상대방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낯선 긴장과 불편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무섭게 진행되는 세계화 작업은 지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하나 색출해 처벌하고 있다. 필리핀의 어촌, 덴마크의 농촌, 아프간의 산골 어느 한 곳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

 

 

여행, 타인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

 

나를 알려면 다른 사람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의 가치와 태도 그리고 행동을 보면서 나는 상대방과 같은가 혹은 다른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즉 상대방이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나는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를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여행을 하는 일이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방법으로 생활하게 되면 익숙하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자연히 긴장하게 되고 또한 여러 가지 생각하지 못한 불편을 겪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긴장과 불편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갖게 된다. 그러한 불편을 겪으면서 우리는 자연히 이 사람들은 왜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9·11 테러 1주년을 맞은 국제정치의 상황은 점점 더 미국의 독주에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뉴욕의 빌딩에서 무고히 숨져간 수많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미국의 선택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아프간이나 혹은 이라크에서 희생당한 혹은 희생당할 무고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또한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식민화, 근대화 그리고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무섭게 진행되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의 사람들을 단일한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선택하게 하는 작업이 물밀듯이 넘쳐나고 있다. 경쟁력과 효율성이라는 자본주의의 무기는 이제 지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하나 색출해 처벌하고 있다. 필리핀의 어촌, 덴마크의 농촌, 아프간의 산골, 에티오피아의 초원 어느 한 곳도 예외가 되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도도한 흐름의 중심에는 작년 9·11 테러가 발생했던 뉴욕이 자리잡고 있다. 뉴욕의 월가야말로 요즈음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불리는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를 총지휘하는 사령부다. 이 곳에서는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지고 전 세계를 상대로 돈벌이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벌 스탠더드’는 모두 뉴욕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자. 도대체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괴물은 언제부터 출현하였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1989년 동구와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물론 냉전이다. 그러나 냉전은 체제일 뿐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 건 ‘근대화’였다. 그것이 서구식이건 동구식이건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제3세계의 모든 나라는 근대화를 추구했다. 마치 요즈음 세계화에 매달리듯이. 그러나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집합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는 동구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는 서구식이었다.

 

내친 김에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 보자. 두 번의 세계대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식민화’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그리고 일본과 같은 열강이 모두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마치 요즈음 뉴욕에서 시작된 ‘글로벌 스탠더드’를 너도나도 따르듯이 당시에는 식민지경영에 모두들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열강의 숫자만큼 많았다. 일본의 식민지와 스페인의 식민지는 한편으로 식민지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 스페인만큼의 차별성을 가진 것이었다.

 

이제 연결을 해보자. ‘식민화’, ‘근대화’, ‘세계화’. 우리가 이른바 근대라고 부르는 역사의 큰 줄기를 굽이친 세 가지 큰 흐름이다. 세 흐름 모두 서양이 주도한 것이고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따랐다. 그러나 그 기준은 단계적으로 단순화되고 있다. 열강의 숫자만큼 다양한 식민지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의 근대화, 그리고 이제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단 하나의 선택이 주어지고 있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정체성?

 

다시 정체성으로 돌아가 보자. 서로 다를 때 우리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점차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의 잣대를 가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추며 살아가고 있다. 덴마크의 농촌, 아프간의 산골, 필리핀의 어촌, 에티오피아의 초원에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방식으로 결혼하고,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같은 방식으로 장례를 치른다고 생각해 보라.

 

여행하며 더 이상 긴장과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만 할 일인가. 상대방과 나의 다름을 성찰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골치 아픈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할 일인가. 다름과 차이는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 문화의 궁극적인 뿌리다. 더구나 ‘나를 따르라’는 부시의 대외정책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지를 생각해 보면 차라리 서로 다른 것 때문에 우리가 겪는 성찰의 고통이 더욱 소중하지 않겠는가.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 교수
필리핀 교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