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최병렬 대표에게 묻는다
 
야당 아닌 국정책임 정당 … 국민은 비전·원칙의 지도자 원해
 
▲ 유석춘/연세대 교수

어제 오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기자회견 소식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결의하여 통과시킨 측근비리 의혹에 대한 특검법안을 대통령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어찌 원내 제1당의 대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회를 거부하는 대통령을 거부”하기 위해 103명이나 되는 의원들의 사퇴서를 “가슴에 안고” 최 대표는 한국 정치에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쓰이던 단식농성이라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한편으로 최 대표의 선택에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거부권 행사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는 구차한 설명이 어쩐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법대로”를 자꾸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과연 한나라당과 최 대표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제의 기자회견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최 대표와 한나라당은 “국민 여러분을 뵐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 측근의 비리 의혹 못지않게 한나라당의 비리 가능성에도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정치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로부터 불거진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최 대표 개인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문제를 원내 제1당의 대표가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최 대표는 민의를 거부한 대통령의 문제에는 몸을 던져 저항하면서, 자신이 대표로 있는 당의 비리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민의 수용을 시도하지 않습니까.

일관성 없는 최 대표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대통령 측근 비리를 수사하는 대검 중수부에 관한 평가 또한 냉온탕을 오가며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위헌 소지가 있는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국민들은 한나라당을 국정의 감시자인 야당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내의석 반수보다 12석을 더 가진 국정의 책임자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수권을 목표로 하는, 그리고 책임을 가진 정당이라면 최근 국가적 쟁점이 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어야 합니다. 예컨대 부안의 핵폐기물처리장, 이라크 파병, 신행정수도 건설 등과 같은 국가적 현안에 한나라당과 최 대표는 국민과 당원의 의견을 수렴하여 보다 적극적인 입장표명과 설득작업을 시도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무런 기준도 없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결국에는 정부의 발목을 잡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어제의 기자회견에서 최 대표는 노무현 정권의 인기영합적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최 대표의 문제제기에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한나라당, 그리고 최 대표 또한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민들은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확실한 비전과 원칙을 가진 지도자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굶주리고 억압받던 나라를 풍요롭고 자유로운 나라로 만드는 데 묵묵히 기여해 온 절대 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과연 지금 누구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가 문제라면 지금부터라도 과거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고백하고 지혜를 모아 설득력 있는 대안을 모색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특검거부 철회를 위한 단식농성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 전가의 보도를 빼들었다면 이번 기회에 진정으로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해 주기 바랍니다.

(유석춘·연세대 교수·사회학)

 
입력 : 2003.11.26 17:43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