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덜 더러운 자의 위선적 개혁
 
한국 정치의 원죄 불법자금 … "모두 똑같다"는 전제서 시작해야
 
▲ 유석춘/연세대 교수

우리의 현실정치가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정치의 현장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이나 연구하는 학자 등 정치현실을 조금이라도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국의 정치가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이 지난번 대선에서 처음 등장한 문제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을 선출한 선거과정은 물론이고, 김대중·김영삼·노태우 대통령을 만들어 낸 각각의 선거과정도 모두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이 투입되었음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나아가서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정치자금이 집권 여당의 문제일 뿐 야당에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권위주의를 종식시킨 민주화 이후의 선거는 모두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여야 모두에 강요하여 왔다. 한국 정치를 떡 주무르듯 주무른 3김은 물론이고, 포스트 3김 시대를 선도한 이회창과 노무현 역시 이 문제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한국정치의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조건으로 존재하여 온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은 그럼 어떻게 마련되어 왔는가. 규모가 큰 만큼 이를 조달하는 과정이 투명하고 정의로울 수 없었다. 부정하고 부패한 돈이 아니면 이를 감당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선거를 고리로 기업은 음성적인 자금을 제공하고 선거가 끝나면 보험금을 타가는 방식으로 혜택을 제공받는 뒷거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따라서 정경유착은 이 땅에서 정치를 하는 한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원죄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이 원죄는 집권을 목표로 선거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집단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 왔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여와 야 혹은 보수와 진보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고통스러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원죄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기울여 왔는가. 민주화 이후 추진된 개혁은 모두 직·간접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지금껏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는 내년의 선거가 과거의 선거와 비교해 더 깨끗한 선거가 될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그 수많은 개혁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은 바뀌지 않는가. 불행하게도 지금까지의 개혁은 모두 이 문제를 정면에서 접근하여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개혁은 모두 “나는 깨끗하니 개혁의 주체가 되고, 너는 더러우니 개혁의 대상이 되라”는 이분법에 갇혀 추진되었다.

이 땅의 현실을 성찰하지 않는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한국정치의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를 되돌아본 다음 “이렇게 합시다”를 할 때 우리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범죄 집단이 또 다른 범죄 집단을 상대로 추진하는 위선적인 개혁으로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십보밖에 도망가지 않았는데 너는 백보나 도망갔으니 너만 처벌 받아라 하는 논리에 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도둑놈’이라는 현실을 보고 있는데 어찌 위선적인 개혁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유석춘·연세대 교수·사회학)

 
입력 : 2003.12.17 17:5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