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개혁의 탈을 쓴 퇴보
 
'얼짱' 판치는 反動문화 … 386도 정치자금 펑펑써
 
▲ 유석춘/연세대 교수

한국은 변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다. 변해도 엄청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분명 과거보다 풍요롭고 또 자유롭게 살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에 살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던가. 또한 우리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을 요즘처럼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고 언제부터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구체적인 예 몇 가지가 더 분명하게 오늘날 한국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제부터 우리가 월드컵 4강이 될 수 있다고, 또한 언제부터 우리가 프로 골퍼가 돼도 떼돈을 벌 수 있다고 믿게 되었는가. 우리가 언제 국내에서 박사를 해도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이나 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언제부터 국산 영화를 만들어 관객동원을 1000만명이나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는가.

변화의 역동성(力動性)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계 100대 기업에 한국의 기업들이 포함된 사실을 우리가 언제부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또한 우리가 언제부터 외국에 나가 자막 처리된 한국의 드라마를 시청하며 로밍 서비스를 통한 휴대전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는가. 우리 대학이 외국의 고등학교에서 신입생 충원을 위한 입학설명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했었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변화가 모두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람 둘이 마주치면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좁기만 한 아파트 복도를 오가는 이웃에 대한 관심을 우리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스스로의 인격을 배양해야 할 젊은이들이 언제부턴가 하향평준화의 덫에 걸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관에 경도되어 있다.

부정적인 변화의 예는 끝이 없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던 학자가, 어느 날 갑자기 권력의 시녀가 되어 시민사회를 국가의 도구로 만드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선천적인 조건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진보’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외모가 능력이라고 믿는 ‘얼짱’ ‘몸짱’ 신드롬과 같은 ‘반동’적인 가치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핵의 위험성 때문에 지역 주민이 동의한 방폐장 건설도 좌절시킨 환경단체들이 한반도의 다른 한 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군사용 핵개발에는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일, 사회적 약자(弱者)에 대한 관심을 존재의 이유로 삼은 ‘참여정부’가 탈북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 또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변화의 현장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부정적인 변화의 압권은 단연 정치권이다. 정의의 화신(化身)인 학생운동 출신 개혁 정치인이 구태 정치인의 뺨을 때리는 수준으로 정치자금을 밝힌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과자라도 당장의 정치 현실에서 도움이 되는 발언을 하면 ‘의인(義人)’이 되고 몇 십년간 국민의 어른 노릇을 한 종교 지도자라도 당장의 정치 현실에서 불리한 발언을 하면 ‘반개혁 수구(守舊)’로 몰아붙이는 세태가 오늘 우리의 정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새 정치를 한다면서 자치단체장이 당적을 바꿔 집권당으로 가면 ‘개혁의 주체’로 포장되고 기존의 당적을 고수하면 ‘개혁의 대상’이 되어 심지어는 자살이라는 선택까지도 강요당하는 현실을 과연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가.

(유석춘·연세대 교수·사회학)

 
입력 : 2004.02.04 18:1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