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004.05.18(화) 17:29
 
보수의 길 찾기

△ 유석춘 연세대 교수 / 사회학
돌이켜 보면 한국의 ‘보수’는 스스로를 먼저 보수라 부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라 이름 붙인 집단으로부터 상대화되어 ‘보수’라는 상표를 부여받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보수가 무엇이며 또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 보수를 공격하고 비판해 온 ‘진보’는 과연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라는 용어는 좌파 운동권이 현실의 변화에 적응하며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대중성 확보를 위해 내세운 개념이다. 이들은 초기에 ‘계급투쟁’(PD) 혹은 ‘민족해방’(NL)과 같은 폭력적 혁명노선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좀더온건한 노선의 ‘사회 민주주의 모델’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투쟁의 방법이 온건해졌다고 해서 진보가 좌파적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하는 분배·인권·평등과 같은 가치를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보의 공격을 받는 보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였는가. 진보가 공격하고 있는 보수는 다름아닌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는 혼란 속에서 오로지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국가건설과 산업화에 매진한 집단이고 노선이다. 냉전의 유산이 지배하는 한반도에서 이들은 북과의 대결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진보의 시각에서조차 보수가 이룩한 국가건설과 산업화 그리고 경제성장 자체를 부정하긴 어렵다. 성장 없는 분배, 안보 없는 인권, 경쟁 없는 평등은 하향 평준화로 귀결될 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는 스스로의 역할과 위상을 적극적으로 정립하고 나아가서 홍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보수는 스스로 주도한 성장에 취해 산업화의 그늘에서 소외되고 있던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소홀히 했다. 또한 그로부터 비롯된 정당성 위기를 강압적 물리력에 의존함으로써 보수는 민주화의 요구를 외면했다. 나아가서 보수는 냉전과 남북대결이 강요한 안보의 중요성에 안주하며 인권의 사각지대를 양산했다.

좌파적 정체성을 배경으로 한 진보가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에 호소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를 위한 성장이고, 누구를 위한 안보이며,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를 묻는 진보의 질문에 보수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가 득세한 민주화 이후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에서 보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필요한지를 잘 알 수 있다.

노조의 ‘제몫 찾기’, 경제위기 때의 ‘공적자금’, ‘대북포용’은 모두 보수의 성공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진보는 애써 보수의 역할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청사진은 없고 허구한 날 네 탓이라는 싸움만 벌이고 있다. 또한 우리가 앞으로 무얼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고, 대신 지금 있는 걸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는 통합되는 방향으로 나가기는커녕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진보의 상대 개념으로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보수는 이제 진보를 보수의 상대 개념으로 위치지을 수 있어야 한다. 좌파적 가치는 우파적 가치를 전제로 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국민을 상대로 설득해야 한다. 분배와 인권 그리고 평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국 하향 평준화된 도토리 키 재기식의 싸움판을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이젠 깨닫고도 남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