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4-07-29 19:26
 
[시론]유석춘/입을 막아 국민통합 하려는가
 
모처럼 생산적인 소식을 들었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개최한 ‘사회통합을 위한 갈등관리정책 워크숍’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갈등 해결을 잘해야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다’는 취지의 모두 발언을 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갈등과 반목, 그리고 분열과 대립에 시달리던 국민에게 이제부터는 화해와 상생의 시대가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도록 하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갈등이란 갈등 다 만들어 놓고”▼

‘저항’보다는 ‘대안’을 추구하는 참여가 바람직하다는 갈등 해결의 모델까지 제시하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실로 국민으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실천이다. “우리 사회를 갈래갈래 찢어 놓은 갈등이란 갈등은 모두 만들어 낸 당사자가 이제 와서 새삼 무슨 말인지…”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최소한 국민의 절반은 되어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는 그와 같은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다. 대통령은 이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자존심마저 벗어던지고 온몸으로 대안을 마련하는 실천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는…내 임기 중에 한국 정부가 한일간 과거사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보다 더 화끈하고 통쾌한 갈등 해결을 본 적이 있는가. 한일간에 진행되어 왔던 지루한 역사 논쟁을 발전적으로 종식시키고 미래를 위한 공조와 평화에 대한 대통령의 이해심과 포용력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발언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이것뿐인가. 대통령은 이참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둘러싼 갈등과 반목의 역사 또한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여당의 의석이 국회의 절반을 넘는, 물리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이용해 이미 한 세기가 지난 ‘동학농민혁명군 명예회복 법안’과 반세기를 넘긴 ‘친일행위진상규명특별법안’ 등 수많은 과거사 청산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참에 좌우, 남북 갈등의 상징인 국가보안법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이 폐지되어야 할 판이다. 대통령이 기대하는 갈등의 해결과 역사의 청산이 그리 요원한 일도 아닌 듯싶다.

그러나 문제는 갈등 해결과 국민통합의 방식이다. 만약 통합과 평화가 한쪽의 입막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 통합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앞에서 한일 양국간 평화와 공조를 위해 스스로 ‘입막음’을 공언했지만 한국사회 내에서 국민통합과 평화를 위해, 또 화해와 상생을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할 쪽도 이미 규정했다. ‘썩은 내 나는 신문’이 그러하며 ‘유신독재 시대 핵심 세력의 딸’이 대표를 하는 야당 세력이 그러하다.

천도에 반대하면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고, 국가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벌이면 ‘패가망신’을 당할 판이다. 특정 지역의 몰표가 집권의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의 몰표는 ‘악’이고 자신을 지지한 그 특정 지역의 몰표는 ‘선’이라고 편을 가르니 당해 낼 재간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 편은 선이고 남의 편은 악이라는 논리는 결국 갈등의 해결을 ’권선징악’으로 몰고 갈 뿐이다.

▼‘우리편은 善, 남의 편은 惡’ 곤란▼

우리는 이제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하늘로부터 권력을 부여 받았거나 물리력을 가지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힘으로 갈등을 해결하거나 봉합하던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모색하자는 대통령이 한쪽의 일방적인 함구를 강요하며 갈등을 해결하고 봉합하려 한다면 ‘성숙한 민주주의’의 만발은 우리 사회에서 요원하기만 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 총리에게 보여 주었던 과거사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심을 대통령은 우리 국민에게도 보여 줄 수 없는가.

유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