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박정희와 레닌 /유석춘
현재 기준으로 과거 재단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한다.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것이다. 우리가 처했던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잔혹한 일들은 결국 이해되고 변호될 것이다'. 레닌은 아마도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이 혁명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폭력과 잔혹의 장면을 용서받고 싶었을지 모른다.

더욱 진보하고 풍요로워진 그래서 행복할 미래의 그들에게 지금 자신들이 어쩔 수 없이 묻힌 손의 핏자국 하나하나가 쌓이고 쌓여 미래의 그들이 결국에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과 열정, 그리고 그렇게 풍족해지고 너그러워질 미래의 세대에 대해 비굴하지 않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서 혁명가 레닌의 자신감은 물론 비장함마저 느끼게 된다.

"다시는 자신과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훔치는 박정희의 모습을 기억하며 레닌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오바'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런 박정희의 모습을 두고 정치적으로 계산된 제스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공산당을 때려잡은 박정희의 행적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레닌의 묘비명과 같은 처연함을 보여 준다. 그가 처했던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잔혹한 일들에 대해 그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며 스스로의 잔혹함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서역만리 외국으로 가족을 용병으로 또 간호사로 수출해야 했던 그 시절에 박정희는 울분을 삭이며, 그래도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후세대는 적어도 지금의 당신들보다 더욱 행복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라 믿었을 터이다. 그리고 레닌처럼 그것으로 후세대에게 지금의 부끄러운 과거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의 모습에 대해, 우리의 윗세대가 불가피하게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또 얼마나 관용하고 있는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이들을 무덤에서 끄집어내 부관참시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죽은 이의 책임을 묻고 있지는 않은가. 단순히 박정희만이 아니다. 역사적 질곡의 소용돌이에 얽혀 오욕과 불행의 삶으로 점철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모습에 대해 우리는 편리하게도 지금의 기준으로 칼춤을 추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너그러이 이해하고 변호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과거의 우리보다 훨씬 불행하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 세대의 불가피한 잔혹한 선택들이 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던 국가를 한 세대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불이 되는 국가로 바꾸어 놓은 것이 현실이다. 서구의 국가들이 한 세기에 걸쳐 이룩한 성장을 이들은 한 세대 만에 압축해 이루었다.

경제적 번영을 구가함은 물론이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했고 나아가서 문화적 선진화를 모색하는 역동적인 한국의 배후에는 피로 얼룩진 오욕의 과거가 있다. 그러나 그 오욕의 역사 때문에 우리 민족이 아직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배부른 투정에 불과할 뿐이다. 레닌이 묘비명에서 용서를 구하고, 박정희가 스스로 침을 뱉으라고 인정한 과거의 오욕을 우리는 끊임없이 자학하며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적어도 과거의 그들보다 조금이나마 풍요롭고 행복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이제는 조금은 더 과거의 그들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어제의 세대가 손에 피를 묻히고 눈물 젖은 빵을 나누어 먹으며 물려준 행복과 풍요를 누릴 자격이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정에 자신의 평생을 바치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잘못을 당당하게 인정하며 다음 세대의 관용을 기다리는 두 개의 묘비명이 마주하는 현실은 그러나 너무도 대조적이다. 러시아는 '실패'한 레닌을 유리관에 보호하며 영웅으로 추앙하는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반면, 한국은 '성공'한 박정희에게 동상 하나 허락하지 않는 인색함을 보여주고 있다.

/연세대 교수 사회학
[2004/10/17 2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