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도청 내용보다는 도청 자체가 문제다
2005/08/10 | 유석춘
 
도청 문제의 핵심 쟁점은 안기부 혹은 국정원과 같은 국가 정보기관의 불법 도청이 수사대상이냐 아니면 불법으로 도청된 테이프에 담긴 내용이 수사 대상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 법은 ‘불법으로 획득한 자료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검찰은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우리 법이 이를 규정하고 이유는 바로 이 법 규정이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는 법 정신 때문이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국가기관에 의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적 영역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는 사태를 막을 수 없다. 가혹행위나 고문에 의해 수집된 자료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전 안기부 직원 공운영씨의 집에서 274개의 도청테이프가 압수된 이후 도청사건 처리와 관련한 열린우리당의 입장이 바뀌고 있다. 한나라당과 삼성 그리고 중앙일보 간의 커넥션이 담긴 테이프 한 개만이 공개됐을 때만 해도 “검찰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거나 “검찰 수사를 지켜보고 미진하면 특검을 도입할 수도 있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 도합 274개의 도청 테이프가 발견된 이후에는 제3의 기구 이른바 ‘진실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소급입법도 불사하는 한시적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우리는 이러한 여권의 입장 변화 배경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혹 일각에서 거론되는 것처럼 검찰이 압수한 테이프에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의 정부’ 인사들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 내지는 정보 때문은 아닌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은 호남이라는 지역기반 마저 잃고 있는 집권세력이 궁지에 몰린 나머지 고양이에게 대드는 쥐처럼 ‘판을 흔들어’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있는 집권 후반기 상황을 타개해 보려는 ‘막가파식 정치’의 재등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당의 해법은 의문투성이다. 제3의 기구(진실위원회)를 구성한다면 그 기구가 수사 대상도 결정하고 또한 도청내용 중 공개할 것과 공개하지 말 것을 구분 및 선택하자는 말인가? 그와 같이 엄청난 권한을 행사할 위원회를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또한 어떤 절차로 선발 및 구성할 수 있는가? 나아가서 어떤 법률적 근거로 그 위원회에게 그와 같은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가? 그 위원회가 수사 대상과 도청 내용의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원칙과 준거는 무엇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임의적이거나 자의적이지 않을 보장이 있는가?

결국 무엇은 덮고 무엇은 수사 또는 공개해야 하는지 등의 판단에 대한 객관적 기준에 대해 또 한 차례의 국민적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진실위원회에 참여할 위원들도 인간인 이상 자신의 이념과 정치적 성향은 물론 개인적 친소관계 등에 따라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을 할 소지가 매우 크다. 여권은 이와 같은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또한 특별법 제정은 사실상 소급입법으로 '불법의 합법화'라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문제도 안고 있다. 비록 한시적이라 할지라도 향후 유사 사건이 재발할 때마다 동일한 논리를 적용해 특별법 제정을 남용하는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수사기관이나 권력기관의 인권 침해 행위는 물론이고 나아가서 국가기관의 범법 행위 자체를 사실상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불법으로 도청된 테이프는 절대 공개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테이프 자체가 태어나서는 안 될 불법도청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검찰이 수사를 위해 도청된 내용을 듣는 행위 자체도 간접적으로 불법 도청을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테이프의 내용을 듣지 않아도 도청의 불법성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분명 필요한 일이고 또한 가능한 일이다.

만약 도청이 문제가 아니고 테이프에 담긴 내용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테이프의 내용이 공개되어야 한다면, 앞으로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불법도청을 통한 권력적,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행위가 公私영역에서 활개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대한민국 법치주의 질서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들 것이다.


최근의 도청 테이프 공개를 주장하는 여론은 국익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정치권이 국민의 호기심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적 발상에 의지하여 진행되고 있다. 여권 일각의 이와 같은 인기영합적 해법은 일시적으로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 인권유린과 법치주의의 붕괴라는 폐해를 가져 올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하다.

'불법으로 획득한 증거나 자료는 불법'이라는 법 규정 및 이를 뒷받침하는 법 정신이야말로 인권 보장의 절대적 장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검찰이 됐든 특검이 됐든 수사의 핵심은 불법도청이며, 또한 이로 인해 파생된 도청테이프의 유출, 유통, 거래, 협박 등이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