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무현 정부의 이상한 고령화 대책'
 


▲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당시 여당의 의장이었던 정동영 의원의 노인 폄하 발언에 노(怒)한 노심(老心)이 투표장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젊은이들의 촛불이 지난 대선에 역할을 하였듯이, 투표장으로 향한 노인들의 화난 발걸음 또한 지난 총선에서 역할이 없지는 않았을 터이다.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문제를 놓고 노인들의 분노가 재현되었다. 명예교수들이 앞장서 성사시킨 700여명 지식인들의 반대 성명에 이어, 전직 국방부 장관과 군 원로, 전직 고위 외교관, 전직 경찰 수뇌부, 그리고 기독교 원로 지도자들의 반대 시위, 성명, 선언들이 줄을 잇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이만큼 각계각층의 전직 고위 공무원들과 사회 원로들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의 주장에 반대하는 집단적인 의사표현을 한 일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집권 여당은 과거 나랏일 한 어르신들의 잇따른 성명을 노욕이라 폄하하기도 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집단행동이라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들은 이제 지킬 기득권이 없다. 기득권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현직을 떠나 재야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직(前職)은, 더구나 노인은 결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구조적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니 이들의 행동을 두고 노욕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숨겨진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이에 자식 세대와 같은 연배의 대통령과 그 주변 386을 상대로 세상일을 두고 따따부따 논쟁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까닭이 없다. 생활의 현장을 벗어나 이제는 삶의 무게를 현명함으로 우회할 그들이다. 민주화 세대처럼 당시의 투쟁이 몇 년 후 빛나는 보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기에는 세월이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나간 삶을 반추하고 정리하기에도 남은 삶이 너무나 소중한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정치적 행동을 개시하면서 사회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손자들의 재롱이나 보며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기에는 한국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인생에 의미를 두었던 과거의 한국은 물론 다음 세대의 미래까지 위협하는 정권의 실책들이 노년의 사회적 책임과 역사적 의무를 일깨우고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다.

흔히들 노인의 사고(四苦)로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 병고(病苦)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는 한국 노령화 사회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나라 걱정하기에 바쁜 이 와중에 어찌 무위고를 말하랴. 사회와 격리는커녕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끼리 연대하여 사회에 적극 참여하기를 요구받고 있으니 고독고 또한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쯤 되면 조용히 살고자 하는 분들의 염장을 주기적으로 질러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각성하게 하는 노 정권의 실책(失策)이 그들의 무위고와 고독고를 해결하기 위한 정권 나름의 노령화 대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지 않을 수 없다. 2004총선에서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주더니, 이제는 그들을 국가의 명운이 걸린 안보문제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정권의 노령화 대책이 빈고와 병고에도 약효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뜩이나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재정의 악화로 갈수록 심화되는 빈고는 물론이고, 나라 걱정에 지치고 상한 몸과 마음에 병고는 깊어져만 가고 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노무현의 대한민국 앞에 분연히 떨쳐 일어난 원로들의 의지가 우리를 숙연케 한다.



유석춘 · 연세대 교수 · 사회학
입력 :2006.09.1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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