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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무너지는 시장만능주의 신화-유석춘(연대교수)
스위스의 작은 마을 다보스에는 매년초 전세계의 경제 전문가들이 모여든다. 바로 그 해 세계의 중심 이슈를 논의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예년보다 적은 3천여명이 참여했지만 세계 경제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올해 포럼의 주제는 ‘책임있는 세계화―세계화의 충격 관리’였다. 이와 관련하여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화는 이미 삶의 현실이 되었고, 우리는 단기적 이익만 추구하는 세계화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몇년간 미국과 유럽 및 국제기구들이 중심이 되어 전파해 온 세계화의 핵심은 국가의 경제 개입을 억제하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한 경제의 자율적 조절이 효율적이라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논리였다. 신자유주의 시각에서 제3세계 국가들의 적극적 경제 개입은 시장의 기능을 왜곡시키는 못마땅한 행동일 뿐이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80년대 이후 세계 곳곳의 경제 위기를 이용하여 각국의 시장에 걸려 있던 빗장을 푸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왔다. 외환 위기를 맞이한 한국이 예외로 남을 수는 물론 없었다.

그러나 현재 시장의 우월성 홍보에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은 1930년대의 경제공황을 ‘뉴딜정책’이라는 개입을 통해 극복한 국가다. 제2차대전 직후 ‘마샬플랜’이라는 미국의 원조를 받던 유럽도 개입에 의존한 역사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80년대초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의 위기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를 내건 복지국가의 비효율 때문이라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음에 따라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는 세계화의 첨병으로 자리잡고 과거를 부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장이 만능이라는 신화가 무너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 맡겨 놓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세계화의 환상은 국내적으로는 불평등의 확산을 초래했고, 국제적으로는 부국과 빈국의 격차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시장이 성장에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분배의 문제나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에 있어서는 지극히 냉담하다는 지적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부정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우월성과 국가의 열등성을 그토록 홍보하는 이유는 두가지 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첫째는 시장과 국가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두 영역이 서로 분리, 대립되는 관계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전세계의 시장이 모두 동일한 기제로 기능한다는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획일적으로 보이면서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이 시장과 국가의 관계다. 예컨대 미국과 유럽의 시장에서는 비경제적 요소, 특히 가족주의와 같은 인간 관계의 중요성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자라온 개인주의 문화가 경제적 교환을 매개하는 자유시장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유교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에서는 혈연·지연·학연과 같은 인간 관계의 연결망이 경제적 교환을 매개하는 시장의 기능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또한 국가는 시장과 반드시 분리되어 대립하는 관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다양한 시장, 즉 개별적인 상품시장은 물론 자본시장이나 노동시장 등과의 관계 속에서 입체적이고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번 WEF에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와 둥젠화(董建華) 홍콩 행정장관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개입이 동아시아 지역에 존재해 온 독특한 국가와 시장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서 그들은 세계화 역시 지역 및 국가의 특성을 감안하여 탄력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시장은 주어진 역사와 문화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시장의 조건에 따라 시장의 기능을 보완하고 대체하는 의미에서 경제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시장과 국가의 관계를 획일화시켜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경쟁의 상대로만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는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런 삶의 양식을 담아내지 못하는 화석화한 정책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 시대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화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유석춘 연세대교수 사회학>
기사 게재 일자 1999/03/10    |   기사 저장 시간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