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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한국적 인간괸계' 제도화를-유석춘(연대교수)
우리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농경(農耕)에 적합한 촌락을 이루고 살아왔다. 사람들은 대부분 조그만 마을에 모여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마을 안에는 몇 개의 성(姓)만이 있었고, 따라서 낯선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서로가 잘 아는 사회에서 행위의 규칙은 인간관계 속에서 체득하게 되는 관습이었고, 사회는 곧 가족과 통했다. 이때 발생하는 신뢰는 계약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서로 잘 아는 사이의 행위 규칙에 대한 익숙한 숙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믿을 수 있고, 내가 지금 베풀면 그 사람이 다음에는 꼭 나를 챙겨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아는 사람에게 신뢰를 갖고 의리를 지키려는 모습이 능력과 효율을 무시한 비합리적인 가치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취직을 위해서는 아는 선배·동문·고향사람·종씨를 찾고, 각종 경조사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인들은 어리숙하고 인정이 많아서 이렇게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들을 지난 몇 십년 동안 계속해 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경제와 부를 확대해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신입사원 채용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공고를 하고, 철저한 필답고사·실기고사·적성검사·면접고사를 거치는 공개 경쟁을 통한 채용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아는 고향 사람이나 동문 후배를 직접 혹은 추천에 의해 채용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전자의 경우 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채용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절차와 제도를 마련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고비용의 어려운 절차를 통해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보다 좋은 조건의 직장에서 높은 봉급으로 유혹한다면, 언제든지 직장을 옮겨버릴 수 있다. 결국 고용주는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될 위험 부담을 항상 가지게 된다.

반면에 아는 사람의 추천이나 연고에 의한 채용인 경우, 추천해 준 사람의 얼굴을 생각해서, 그리고 연고로 얽힌 인간관계 속의 자신의 입지와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당사자는 열심히 일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자기 편리한 대로 직장을 쉽게 옮기지도 못한다. 즉, 연고로 얽힌 인간관계는 개인을 규제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또한 사업주는 직원을 채용해 준 대가로 그 연고 집단을 통해 다양한 문제 해결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믿을 수 있고 위험 부담이 적은 저비용 고효율의 채용 방식을 두고 체질에 맞지도 않는 어려운 방식을 왜 활용하려 들겠는가.

일찍이 막스 베버는 동양사회를 분석하면서, 경제행위에는 예측 가능성과 계산 가능성이 필수적인데 동양사회에는 이것을 부여하는 국가의 법과 제도 및 규칙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속 연구들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연고로 얽힌 광범위한 연결망 결사체가 대신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방대한 상업조직과 같은 제도가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군의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결망이 주는 신뢰가 감시 비용을 낮추며 경제적 효율을 제공하여 산업이 발전할수 있다는 분석도 한다.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공을 설명하는 새로운 견해들이다.

결국 한 사회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행위의 방식과 제도의 유형은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맥락에 따라 서로 달리 전개된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특정한 제도나 규칙이 서로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리라는 예상은 그릇된 것이다. 금융실명·의약분업·고용보험·국민연금 등의 시행착오에서 보듯이 우리는 항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있다.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고 그것을 우리의 체질에 맞는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효율이 어떤 방식의 사회적 신뢰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는 사람의 추천에 의한 신뢰의 확보는 심지어 서구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 대학 졸업생이 대학원을 진학할 때 혹은 회사에 입사할 때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서구는 오히려 우리보다 더욱 더 아는 사람의 영향력을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조직원리로 자리잡고 있는, 연고에 의한 인간관계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제도화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석춘 연세대교수 사회학>
기사 게재 일자 1999/03/30    |   기사 저장 시간 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