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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한국형 '제3의 길'을 찾아서-유석춘(연세대교수)

지하철 노조의 파업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주가가 연일 상승하고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물경제가 그만큼 건실해졌느냐에 대해선 많은 사람들이 회의한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이어 경총도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면서, 힘겹게 출범했던 대타협의 가능성은 공중분해의 위기를 맞고 있다. 고위공직자를 상대로 벌인 절도 행각은 정쟁의 소재가 되어 의혹만 쌓아가고 있다.

세상이 어지러운 만큼 정국을 주도해야 할 집단의 책임이 무겁다. DJP 연합으로 출발한 김대중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지금까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애매한 노선을 기조로 정국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이 구호는 구제금융을 제공해준 외부 자본의 요구와 표를 던져준 노동자 집단 내부의 기대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어야만 하는 집권층 내부의 딜레마를 그대로 반영하는 모순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이 전략은 지금까지 사실상 경제적 지배집단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치달아왔을 뿐이다. 구조조정의 결과로 중산층은 몰락하였고, 서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게 위해, 최근 대통령을 자문해 주는 두뇌집단은 정부의 정책기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신중도노선으로 전환하자는 내용이 핵심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기득권 집단을 보호하는 선택이었다면, 신중도노선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선택일 것이다. 빈부격차의 심화나 실업률의 급등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과 같은 복지정책이 절실하다는 판단이 배경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신자유주의 정책 부작용 심화



그러나 정책의 전환을 건의한 집단이 모델로 삼은 영국 노동당의 소위 제3의 길은 아직까지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체가 모호한 정책이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라는 제3의 길은 우선 정체성이 불투명하다. 이 노선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영국 노동당은 과거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보여 주었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복지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동시에 제3의 길은 국가 경쟁력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어 신자유주의 노선과 차별성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은 마치 한국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애매한 구호와 같이, 서로 결합될 수 없는 목표를 억지로 동시에 해결해 보자는 정치적 수사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집권층의 두뇌집단이 제3의 길을 모델로 하여 신중도노선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이러한 전환은 기존 노선이 정국을 운영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년에 있을 총선을 겨냥한 다분히 정치적인 포석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노선의 추진과 함께 이탈한 서민층의 지지를 다시 껴안을 수 있는 묘수가 필요하다. 집권 초기 국내외적인 압력에 편승하여 채택한 신자유주의 노선이 결실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정책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이유는 표를 의식한 정치논리라고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경제적 약자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새로운 정책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수출을 하지 못하면 굴러갈 수 없는 경제여건을 고려할 때,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개방압력이 더욱 거세어질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그리 넉넉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해관계 조절 리더십 필요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은 강요된 신자유주의 모델도, 정권유지를 위한 복지국가 모델도 아니다. 중립적 입장에서 사회 각 영역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고통분담을 주도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정책결정자들이 사적인 이해관계에 포획되지 않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정신적 무장이 필요하다.

때에 따라 정권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번갈아 들어주는 우왕좌왕하는 국가보다는, 공정성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일관성 있는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제 3의 길이다.

<교토에서 유석춘·同志社大객원교수·연세대교수>
기사 게재 일자 1999/04/23    |   기사 저장 시간 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