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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김영환 전향의 메세지
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다양한 노선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이른바 주사파 지도부의 반성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80년의 광주, 군부독재, 민주화, 냉전의 해체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한국의 학생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80년대의 학생운동 세력은 지금도 ‘386세대’ 라는 이름으로 우리사회의 허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80년대 사회변혁 주도해


80년대의 학생운동이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우리는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군사정권 아래 모두가 침묵할 때 유일하게 ‘노’라고 말했던 집단이 바로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희생에 힘입어 우리는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들의 문제제기 역할을 조직적으로 또한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준 학생운동 지도부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 이른바 ‘주사파’라고 불리는 민족해방(NL) 계열이었다.

주사파의 노선은 이른바 ‘강철서신’이라는 문건으로 학생운동권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1985년 말경 나타난 ‘반제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는 문건일 것이다. 이 문건의 요지는 해방이후의 한국사회는 ‘미제국주의’가 ‘한국민중’을 억압하고 있는 모순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므로,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세력(북한 포함)이 힘을 합해서 투쟁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남북한의 통일을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였다.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은 통일 이후의 과제로 인식되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노선이 주사파 일색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을 기초로 한 민중민주주의(PD) 노선 또한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자본주의 진전에 따른 자본·임노동 관계의 발전을 가장 중요한 대립의 구도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자계급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고, 민족 모순의 해결은 노동자 혁명 이후에 고려해야 할 부차적인 과제로 설정하였다.

한국 학생운동의 역사는 물론 이 두 가지 노선 이외에도 다양한 노선이 등장하였다가 스러져가는 사상적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등장한 반독점투쟁, 반제투쟁, 반파쇼투쟁 등의 이론적 과제는 구체적인 현실과 다양하게 맞물리면서 한국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주도하는 힘이 되었다.

80년대 초반의 학원자주화, 중반의 직선제 개헌, 후반의 올림픽을 전후한 방북시도 등은 학생운동이 80년대 전체를 관통하며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한 사실을 확인해주는 몇 가지 예가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역동적이던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정체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다름아닌 소련·동구 사회주의의 해체라는 역사적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PD계열은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북한 사회의 현실이 가감없이 전해지면서 NL계열 또한 심대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의 전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미 예정된 일이라고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앞으로도 전향은 계속될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사상적 지향이었던 좌익 이데올로기는 이제 역사적 역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었던 학생운동이 영원히 깃발을 내릴 수는 없다.

건강한 문제의식 잃지 말길


한국의 학생운동은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소위 좌편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미 지도부는 사상적 확신을 잃어 버렸고, 운동의 전위대라 할 수 있는 학생회는 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실수를 연이어 저질렀다. 그 결과 오늘날의 학생운동은 일반 국민은 물론 심지어 학생 대중에게도 전혀 관심을 얻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대학 사회의 한 쪽 귀퉁이에 매달려 있다.

김영환의 전향을 통해 한없이 작아진 한국 학생운동의 현실을 발견하며 우리가 착잡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유생들의 상소로부터 일제시대의 저항운동, 그리고 해방이후의 민주화까지 자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여 왔다. 다가오는 21세기의 학생운동이 우리사회의 객관적 현실로부터 출발한 건강한 문제의식을 정당하게 제기하여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고대해 본다.

<柳錫春·연세대 교수·사회학>
기사 게재 일자 1999/10/16    |   기사 저장 시간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