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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386세대와 연고주의
연세대교수·사회학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현상은 국가나 비국가, 혹은 공식과 비공식 부문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거미줄처럼 구축된 연결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연고로 얽혀진 사회적 관계는 개인에게 행위의 자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개인은 부단히 이 연결망을 만들고 유지하는 사회적 투자에 열중하게 된다.

사회적 상승에 보다 유리한 연결망의 회원권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벌 경쟁이다. 그 결과로 한국사회는 엄청난 교육열, 그리고 천문학적인 교육비의 지출을 감당해야 한다. 또한 각종 연고를 매개로 한 친목모임과 경조사를 챙기는 일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혈연·지연·학연을 매개로 한 연결망은 중심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사회가, 혹은 한국 사회의 각 지역 사회가 일종의 ‘좁은 사회’로 인식되는 까닭은 각종 인맥의 자원을 통해 사람들이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중심지향적 사회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한 다리 또는 두 다리 걸치면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얘기하는 이유도 중심지향적 사회에서 중심이 갖는 중요성과 유력한 인맥 및 사회집단들이 중앙으로 모이는 성향 때문이다. 사회를 변혁하고자하는 이른바 386세대도 이러한 성향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마저 한걸음도 못벗어나


대부분의 대학 총학생회장은 정치지망생이고, 대부분의 시민운동가도 정치지망생이며, 지역활동가와 지역봉사자 그리고 재야운동가도 결국은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정당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도, 언론인도, 법조인도, 의사도, 연예인도, 기업인도 모두가 중앙의 정치권력에 접근하기를 지향한다.

선거때면 어김없이 지역의 대표가 당선되고, 3김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맥과 지역분할 구도는 한국 정치현실의 대부분을 설명한다. 정권이 바뀌면 특정 지역의 인맥이 정ㆍ관계를 물갈이하고, 모든 집단의 핵심적 인적구성에 변화가 초래된다.

새 정권이 인사를 단행할 때마다, 그리고 정치개혁을 입에 올릴 때마다 구호는 한결같이 ‘지역주의 청산’이었지만, 결과는 전혀 현실로 반영되지 않아 왔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연고주의와 이것을 통한 비공식적 거래관계를 전근대적인 관행으로, 사회의 일부에 잔존하고 있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연고주의는 한국사회에 매우 뿌리깊이 구조화된 특징이다.

지난 몇십년간 입이 닳도록 서구 선진사회를 모델로 지역주의 청산, 폐쇄적 연고주의 타파, 부정부패 일소, 시민적 책임의식·준법·자발성을 외쳐 왔고, 누구나 규범적으로는 이것을 수용하여 왔지만, 정작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아 왔고, 일종의 공범의식 속에서 기존의 관행들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왔다.

무엇이 한국의 이런 현실을 강제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도록 하고 있는가. 이런 병폐가 ‘과도기적 특수성’으로 인식되는 사회관행 속에서도 지난 몇십년 동안 엄청난 경제적 성장과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러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많은 국가들이 발전국가의 전략을 구사하였지만 동아시아의 소수 국가만이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국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시민단체 활동도 인맥이 우선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밝히고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사회과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초를 열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의 학계는 이런 문제를 정치적 이슈와 연결시키는 저널리즘적인 담론으로 다루거나, 급속한 성장과정이 낳은 과도기적 부작용, 그리고 전통적인 공동체주의가 왜곡 및 변형된 전근대적 잔재 정도로 생각하여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않아 왔다.

386세대가 중심이 된 시민단체 또한 시민사회를 분할하는 특수주의적 ‘연고집단의 존재’를 시민사회 발전의 가장 큰 장애물로 누누이 거론하면서도, 정작 내부는 재야운동이나 학생운동 집단의 인맥, 그리고 지역의 인맥을 중심으로 단체의 역량을 키워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발적인 시민 단체의 활성화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동창들에게 10만원어치의 술을 살 사람은 많아도, 시민 단체에 5만원의 회비를 낼 사람은 없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柳錫春·연세대교수·사회학>
기사 게재 일자 2000/02/24    |   기사 저장 시간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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