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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한국의 지배층과 개혁
유석춘기자
개혁과 기득권,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이 없다면 아마도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일 것이다. ‘개혁’은 현재 주어진 상황을 사회 전체의 기준에서 보다 좋은 방향으로 고치는 작업이다. 그리고 ‘기득권’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의 권리를 말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개혁은 기득권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주어진 조건을 보다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고치는 작업은 필수적으로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발전에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개혁 세력의 도전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서구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예는 봉건사회의 귀족에 대한 ‘부르주아’의 도전이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예는 고려사회의 귀족에 대한 ‘사대부’들의 도전이 있다.

부르주아와 사대부라는 도전자 집단의 사회적 성격은 물론 서로 달랐지만, 이 두 집단은 모두 타고난 신분에 의해 기득권이 자동적으로 재생산되던 귀족의 권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부르주아’는 유럽의 봉건적 질서 아래에서 도시에 살던 상공인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밝았던 이들은 자신들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을 추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를 건설하면서 귀족의 기득권을 잠식해 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의 기득권에 대한 투쟁의 결과로 나타난 근대적 개혁의 구체적인 장치이다.

반면에 ‘사대부’는 고려의 귀족질서 아래에서 통치의 보조자 역할을 하던 문인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다. 물질적 이해보다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자신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왕에게 ‘도덕정치’를 간하는 공론의 장을 만들어 나가며 귀족의 질서를 대체했다.

귀족이라는 타고난 신분보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훈련을 통해 선비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이들은 오늘날 민본주의라고 불리는 개혁을 이룩하고자 노력했다.

추구하는 이상이 달랐고 또한 이상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달랐지만 이 두 집단은 공통적으로 모두 기득권을 공격하며 사회의 구조를 보다 열려진 것으로 또한 공평한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는 몇 백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서구 역사에서 개혁의 주역이었던 부르주아는 유럽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전세계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개혁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 역사에서 개혁의 주역이었던 선비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세계화하는 일은커녕 한반도 내부의 개혁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역사의 뒷자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서구 역사의 주역인 부르주아의 개혁은 과연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할 수 있는가. 최근 이 방식이 우리를 감동시킨 두가지 예가 해답을 제공한다. 다름 아닌 미국 지도층의 입양아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첫번째 예고,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부시가 주장하는 ‘상속세 폐지’에 대한 미국 갑부들의 반응이 두번째 예다.

이들은 기득권의 보호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기득권을 반납하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 상속세의 폐지는 “부자만 이득이고 힘들게 사는 서민에 상처가 될 것“이라는 미국 억만장자들의 주장을 접하는 한국인들은 그래서 더욱 우울하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의 부유층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덕성을 기준으로, 그리고 청렴한 선비를 모델로 개혁을 지향하여 온 우리의 역사가 부르주아식 혹은 서구식 개혁이라는 대안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사회발전의 현실적 동력으로 살아 남지 못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렇다고 서구식 개혁의 참모습을 우리가 철저히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날만 새면 소위 기득권 세력과 개혁 세력은 서로를 비방하고 있다.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교육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다.

우리가 서구의 부르주아 방식을 보다 철저히 따르는 개혁을 선택하건 혹은 우리의 전통적 개혁집단인 선비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방식을 선택하건,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개혁은 기득권과 개혁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사회가 하나의 질서에 통합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권력을 가진 집단이나 갖지 못한 집단이 서로를 인정할 수 있고, 또한 부자와 가난뱅이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함께 살 수 있다. 그래야만 동의에 의한 지배가 가능하다.

<유석춘·연세대교수·사회학>

기사 게재 일자 2001/02/19    |   기사 저장 시간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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