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세 대 학 원 신 문
1998년 10월 9일(금요일) 1면/3면
 
◇ 특집 좌담 - 동아시아론, 쟁점과 전망

동아시아적 가치는 존재하는가
 
   작년 후반기 동아시아 국가들에 몰아닥친 경제위기는 동아시아국가들의 비약적 경제성장과 맞물려 그동안 상종가를 누리던 '동아시아 담론'의 위기로 이어졌다.
   대학원신문에서는 '동아시아적 가치-쟁점과 전망'이라는 주제의 기획을 마련, 동아시아적 가치와 관련된 문제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참석한 사람들>
백영서 <문과대 교수 · 중국현대사> : 사회
유석춘 <문과대 교수 · 발전사회학>
손호철 <서강대 교수 · 정치학>
백영서 : 최근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아시아라는 단어처럼 운명이 급전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기적의 모델로 평가되던 아시아 국가들이 이제는 모멸의 대상마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최근의 동아시아 논의와 관련하여 대립되는 입장을 취해오신 두 분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손호철 선생님께서는 올해 발표된 글에서 최근의 유교자본주의론은 서구의 유교 찬양론과 유교 재발견론에 대한 고민 없는 수입, 요컨대 학계의 지적 식민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선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두 분의 의견을 들어보고 쟁점이 되는 사안들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교자본주의론의 쟁점

손호철 : 저는 아시아적 가치와 관련된 논의에 있어 두 가지의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규범으로서의 아시아적 가치가 있다면 또 하나는 현실을 설명하는 모델로서의 동아시아론입니다. 쟁점이 되고 있는 유교자본주의론은 물론 후자의 예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규범적인 논의가 왜곡된 학문적 주체성, 잘못된 탈식민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면, 후자에 속하는 유교자본주의론 역시 현실설명에 있어 이론적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문의 생산과 유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가지 모두 주체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서구이론에 대한 성찰 없는 수입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유석춘 : 손 선생님의 말씀은 유교자본주의론이 주체성이 없다는 것, 요컨대 뚜웨이밍의 이론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제 글을 자세히 읽어보셨는지 모르겠군요. 물론 제 논지가 서구학자들의 논의에 기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지 수입한 것이냐, 독자개발모델이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자유주의나 맑스주의 역시 그렇게 본다면 모두 수입이론 아닙니까? 다음으로 현실분석모델로는 설명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인데, 사실 모든 이론이 현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한국이 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구가해온 것도 사실이고, 그 동안 부정부패가 만연해온 것도 사실인데 제가 아는 어떠한 이론도 이러한 두 가지 현상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신고전주의나 맑스주의로 이러한 역설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한국에서 경제성장과 부정부패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요컨대 한국에서 부정부패는 구조적 필연이라는 것이죠. 국가를 지배하는 집단이 그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특혜를 주고 순응하지 않은 집단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것, 그리고 그런 원칙에 대해서 국민들이 동의한다는 것, 이는 엄격한 시장적 기준에서 본다면 불합리한 것입니다. 물론 한편에서는 오해도 있습니다. 유교자본주의론은 경제성장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고, 경제가 파탄난 지금은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위기에 대한 국가의 해결방식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로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이나 금융권이 구조조정을 하면 정부가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과거 특혜를 통한 성장 패턴과 동일한 것입니다.

유교와 연고주의, 한국사회

백 : 유교라는 가치체계와 자본주의발전의 선택적 친화성에 주목했던 종래의 문화론적 설명방식과는 달리 문화보다 제도를 강조한다는 것이 유 선생님 주장의 특징인데, 그렇다면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유교자본주의론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손 :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먼저 얘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유 선생님께서 우리사회에서는 정경유착이 구조적으로 필연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유교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유교자본의론에서 이야기하는 정경유착과 연고주의는 일종의 후견인주의(patronism)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제3세계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설명되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장이 가능했는가 입니다. 라틴아메리카를 보세요. 정통유착과 연고주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유교일 필요는 없습니다.
유 : 국가 대 시민사회라는 분석틀로 설명을 해보죠.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특징은 이윤추구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이나 공공이익에 봉사하는 비 정구기구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연고주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서구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이러한 집단은 사라져야 할 전근대의 유산입니다. 우리사회에서는 이러한 집단들, 예컨대 언론이나 지식인집단이 연고주의의 강력한 영향아래 기능을 발휘하고 있고, 시장이나 국가의 기능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정경유착이나 구조화된 부패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나 남미국가들처럼 몰락하지 않고 이나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 사림의 문화에 기원을 두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손 : 물론 한국사회의 내적인 조직원리로서 연고주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연고주의가 도대체 유교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연고주의는 전(前)자본주의 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유교전통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유교자본주의론의 이론적 취약점은 사림의 역할과 연고주의, 그리고 부패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이 가능한 것, 이러한 각각의 현상들 사이의 내적인 필연 관계가 전혀 규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 : 제 주장에 내적 필연성이 없다는 비판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사림은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서 활동했지만, 관료가 되기전까지나 공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국가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대한 비판자로 기능하였습니다. 이처럼 인적인 유대로 얽혀있는 집단의 기능이 오늘날의 서울대학 인맥이나 영, 호남 인맥 등을 통해 마찬가지로 수행되고 있습니다.
손 : 지식인들이 국가정책에 대해 비판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지식인 집단의 비판이 연고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식인들이 지연과 학연에 의해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가능했다는 말입니까? 지식인들의 비판기능은 유교적 연고주의와 무관한 것입니다.
유 : 중요한 것은 학연과 지연으로 묶여 있는 집단들끼리 경쟁을 했다는 것이죠. 남미의 연고주의와 우리의 연고주의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유교는 지식인의 비판적 기능을 고도로 발달시킨 시스템입니다. 이러한 유교적 연고주의의 비판적 전통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연고주의와 지식인의 지사적 사명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연고주의는 사회를 조직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간주되어야지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읽혀서는 안됩니다.
백 : 중국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과연 유교자본주의론에서 이야기하는 유교가 유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각에서는 유교자본주의론의 유교는 서구인들이 취사선택해 조합한 가공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여고주의는 사실 유교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통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유 : 물론 유교자본주의론에서 이야기하는 유교가 과연 진정한 유교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 가지가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인권이란 개념과 연관 지어 얘기해보죠. 서구의 근대화는 보편적인 인권개념의 확산과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서구식의 보편적 인권개념이 아니라 유교에서 말하는 상대적 인권개념, 예컨대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임금과 신하 사이의 관계에서 출현하는 역할 중심적 인권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연고주의의 아시아적 특수성

손 : 다시 한번 묻죠. 그렇다면 유교의 상대적 인권개념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다는 겁니까?
유 : 거래비용을 낮추었다는 겁니다. 상대적 인권개념은 혈연, 지연, 학연에 의한 결속집단을 발달시키고 이러한 연고집단들이 경제행위에 소요되는 거래비용을 낮추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세요?
손 : 이해가 안됩니다. 차라리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박정희정권에 의해 일종의 동원이데올로기로 활용된 충효사상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인권개념을 상대화시킴으로써 노동착취를 용이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노동집약적 산업화에 기반한 축적전략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까요? 상대적 인권개념과 연고주의, 산업발전을 인과적 설명논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군요.
유 : 연고주의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가 대 시민사회라는 틀 만으로 분석하려 할 때 한국사회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죠.
손 : 물론 중범위적 수준의 설명틀로 유교 자본주의론이 갖는 유효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설명하려 해서는 곤란하죠. 게다가 유교적 유산과 경제발전이라는 현상적 결과를 설명할 인과적 매개항들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도 역시 문젭니다. 다만 유 선생님이 갖고 있는 입장의 독특함은 신제도주의 이론과 유교라는 문화적 전통에 관한 논의를 접합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접합이 대단히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유교권 국가로 볼 수 없습니다. 일본에 있어서 연고주의는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하죠? 유교전통이 오히려 강했던 중국본토시절 경제성장을 못했던 중국이 대만 이주 후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이러한 것들은 토지개혁과 같은 계급적 분석틀을 통해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토지 개혁이 없었다면 한국과 대만의 성공적인 산업화는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동일한 계급적인 조건 하에서 나타난 다양한 변형들에 대해서는 제도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유 :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겁니까? 유교적 전통에 내재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상대적 인권개념이 연고주의라는 제도적 형태로 나타나고 이러한 연고주의가 거래비용을 낮추고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인과적 매개항이 부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군요.
손 : 왜 그것을 굳이 유교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죠? 그 같은 연고주의나 정경유착은 라틴 아메리카에도 존재합니다.
유 :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연고주의는 유교적인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가족주의, 패거리주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손 : 인간관계가 어떠한 차원에서 거래비용을 줄인다는 겁니까? 만약에 그러한 인간관계가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으려면 특정한 형태의 인간관계, 예컨대 정책결정자들 사이의 인간관계라든가..
유 : 국민을 동원할 때 인간관계가 특별히 중요하게 대두합니다. 새마을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죠. 한국사회의 연고주의는 라틴아메리카나 다른 문화권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국민을 동원하는 데 있어 매우 유리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광범위한 동원화는 충효사상이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손 : 충효사상이 유교에서만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입니까? 사회적 동원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즘인데 이것이 유교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 : 그렇지만 서양에서는 그러한 연고주의를 전근대적인 유산으로 치부하여 산업화와 근대화의 추진과정에서 철저히 배격해오지 않았습니까?
손 : 무슨 소립니까?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밀리반드의 설명이나 밀수의 파워엘리트 이론이 모두 서구사회에서 나타나는 엘리트 집단 내부의 서구사회에서 나타나는 엘리트 집단 내부의 인적인 결합을 이야기하는 것들 아닌가요?
유 : 그러한 논의들은 서양사회를 설명하는 보편적 틀이라기 보다는 예외적 소수의 의견들이죠
손 : 소수의 의견이라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서구에서 역시 연고주의에 의한 거래비용의 감소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파워엘리트층에 있어서 연고주의와 인적 유착은 서구나 아시아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유교자본주의론에서 이야기하는 연고주의 역시 엘리트집단에서 나타나는 인적인 결합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워엘리트 이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유 : 국민을 동원하는데 유교적 연고주의가 활용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의 연고주의는 단지 엘리트집단 내부의 인적인 결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백 : 화제를 돌려보죠. 지금의 경제위기를 설명하는 데 있어 유 선생님께서는 단기간의 성장과 현재의 위기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이론틀은 유교자본주의론 뿐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손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볼까요?
손 : 과연 동아시아모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입니다. 네 마리의 용으로 일컬어지는 동아시아국가들 사이의 공통점이란 것은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을 취했다는 것뿐입니다. 개발독재나 재벌체제를 예로 들고 있지만 홍콩이 무슨 개발독재고, 대만이나 홍콩이 무슨 재벌체젭니까? 아시아 4개국의 성공비결은 성공적인 농지개혁을 통해 봉건적 지주를 소멸시키고 산업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것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국가주도형 산업화, 요컨대 박정희 모델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성공의 요인이었는데, 그러한 성공의 동학 내부의 붕괴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편,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차원에서 본다면, 70년대 이후 심화되어온 과잉축적의 위기 또한 동아시아 경제의 위기를 가져온 원인 가운데 하납니다. 이를 다시 국면적인 차원에서 논의하자면, 90년대에 출현한 WTO체제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의 확장 등이 결합되어 위기의 세계화를 낳았다고 봅니다. 사건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YS정권의 경제실정이 지적될 수 있겠고… 만약 대만이나 홍콩은 괜찮은데 왜 한국은 위기인가라고 묻는다면, 박정희 모델에 내재한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라고 보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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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모델은 존재하는가

백 : 위기의 원인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렇다면 한국경제, 그리고 동아시아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두 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신자유주의적 발전모델이 아닌 우리의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모델은 우리 만의 모델일 수도 있고 아시아국가들이 취해야 할 공통의 모델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적 모델에 대한 논의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는 것같습니다. 지역협력모델로서의 아시아적 모델에 대한 입장과 아시아국가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독특한 아시아만의 역사적 경험을 살려서 아시아의 독자적인 발전모델을 구상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유 선생님은 그것을 유교자본주의론이라는 이론틀로 설명하셨습니다. 손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손 : 추구해야 할 단일한 모델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과거에 성장을 가능케 했던 역사적 경험 특정한 발전모델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추구해야 할 모델은 신자유주의도, 국가에 의한 권위주의적 성정전략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 DJ식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아닌, 경제를 민주적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재벌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통제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소액주주운동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노동자들의 경영참여와 재벌의 사회화죠.
유 : 저 역시 신자유주의 모델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처방전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우리사회의 조직화 방식이 서구식 자유주의 모델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죠. 과거 우리경제의 성장비결은 국가가 채택한 원칙에 따라 경쟁력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특혜를 주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가 특혜를 주는 대가로 기업에는 경쟁력을 요구했는데, 최근에는 특혜만 주고 경쟁력 제고방안을 고민하지 않음으로써 경제운용이 지나치게 방만해졌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는 국가가 틀어쥐고 경제를 재조직화함으로써 풀어가야 합니다. 국가정책의 대상이 기업이든 노동자이든 지원은 경쟁력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취해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과거와 같은 긍정적 의미의 정경유착 이외에는 별다른 출구가 없는 셈이죠.
백 : 유 선생님 논리대로라면 좋은 부정부패가 있는가 하면 나쁜 부정부패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부정부패는 말하자면 시장경제 원칙을 최소한 유지하면서 경쟁력 있는 집단에게 특혜를 주고, 지식인의 비판도 어느 정도 허용해준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원칙은 제도화되기도 힘들고 원칙 자체도 대단히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유 : 글쎄요. 재벌을 완전히 투명화시키고 주력업종위주의 전문화를 시행한다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이 몇이나 될까요? 지금까지 성장을 추동 해온 방식들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근본적인 개혁에 매달린다면, 그나마 존재하는 산업기반마저 붕괴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고주의와 관련하여 한가지 덧붙이자면, 현대자동차 사태 때 정부가 공권력 투입을 자제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농성자들의 가족이 농성장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까지 몰려나와 농성을 벌이는 모습이 우리나라 말고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그만큼 연고주의, 가족주의라는 것이 시민사회의 내적 조직원리로서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이죠.
손 : 무슨 말씀입니까? 공권력이 투입되지 못한 것은 현대자동차가 갖고 있는 사회적인 영향력과 조직적인 역량 때문이지, 그것이 농성자 가족들 때문입니까? 만도 기계에서는 농성하던 임산부까지 경찰에 폭행을 당했습니다.
백 : 이야기를 마무리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논의도 정리도 할 겸 한가지만 더 얘기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아시아에 대한 논의 가운데 새로운 문명사적 대안으로서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한 켠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문명사적 대안으로서 동아시아론

손 : 흔히들 동아시아적 가치의 특징을 자연친화적 사고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연친화적 사고는 그런데 아시아적 가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인디언들이나 호주의 원주민들에게는 그런 사고가 없겠어요? 그러한 가치체계는 모든 전자본주의적 사회의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공동체 주의가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아시아국가들이 얼마나 공동체주의적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개인의 인격이 전제되었을 때 진정한 공동체주의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인구의 80퍼센트가 노비인 사회에서 무슨 공동체 주의가 가능했겠어요?
유 :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반하여 이룩된 현대사회가 점차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해체나 개인의 소외, 성적 정체성의 혼란 등이 끊임없이 운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문명의 병리들에 대해서 동양의 유교적 가치가 새로운 문명사적 대안으로서 조명 받을 필요는 있습니다. 모든 전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체계가 유사하다고 하는데, 문명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 패권을 쥐고 있는 서구문명에 대해 대안적 문명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은 아시아적인 가치, 아시아적 문명밖에 없지 않습니까?
백 : 그런데 유교만 하더라도 국가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게다가 아시아인들의 삶에 삼투되어 있는 문화가 유교뿐만은 아닙니다. 불교나 도교, 민간신앙 따위가 복잡적으로 얽혀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문명으로서의 아시아적 가치를 이야기할 때 지나치게 전통적인 사상체계들에 얽매어 있다는 것도 문젭니다. 문명으로서의 아시아를 이야기 할 때 반제국주의 투쟁의 경험 등 최근의 1백 년 동안 겪었던 경험들로부터 추출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봅니다.
손 : 논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아적 경험을 재발견하자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적 경험을 특권화시켜서는 곤란하죠.

경험의 재발견인가, 패권주의인가

유 :  저는 패권주의가 옳다고 생각지도 않고, 아시아의 패권주의가 지금으로서는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의 제국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탈당해왔던 사실을 생각하면 한번쯤 아시아국가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백 : 유선생님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시아적 경험에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민족에 대한 특권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의 장치로서, 그리고 다른 지역의 역사적 경험과 교류가 가능한 새로운 분석단위로서 동아시아라는 중범위의 틀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손 : 그것 역시 수긍하지 힘들군요. 차라리 제3세계적 경험이라고 얘기라고 한다면 모를까... 아시아국가들 가운데에도 패권적인 국가가 있고 아시아국가에 의해 식민통치를 경험한 국가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아시아라는 운명공동체적 틀로 묶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백 : 제 주장의 요지는 이들 국가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자는 것입니다. 지리적 근접성과 역사적 경험의 공유라는 차원을 무시한채 제3세계로 한데 묶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손 : 글쎄요. 선생님의 주장이 일본과 중국을 떼어놓고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미에서 제기되는 것이라면 별로 문제삼고 싶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가치를 사리자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우리 것을 찾자는 주장이 반성찰적인 전통옹호론이나 자민족 패권주의처럼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군요.
백 : 장시간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뚜렷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많은 쟁점과 입장의 불일치만을 노정했지만 이런 대면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정리 :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