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대 신 문 (3면) 1987년 9월 15일
 

Ⅰ. 머리말
필자가 보기에 현대 한국사회 국가연구에서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는 지난 20여 년간의 지속적 경제성장으로 산업화가 심화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등장한 자본주의적 계급구조에 대해 국가가 과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자율성이 발생하는 사회적 기반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이다.
최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국가연구를 주도해온 기본적인 시각은 마르크스주의에 바탕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이었다.
박현채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말할 것도 없고, 넓은 의미에서 주변부자본주의론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한상진의 <관료적 권위주의론>, 최장집의 <과대성장국가와 조합주의 이론> 임현진 김성국의 <종속 혹은 세계자본주의 체제하의 국가이론>등은 모두 우리 사회의 정치현상 (상부구조)의 특징을 그 경제적 토대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도권 밖의 젊은 학자들은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문제의식을 이론적으로 호가인해 보려는 노력, 즉 정치현상을 경제적 토대(계급구조)에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모색하여 왔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과정에서 경제적 토대에 조응하지 않는 정치현상의 독립성이 여러 각도에서 발견되었고, 이들 연구자들도 이 점을 중시하여 자신들이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론들을 일정하게 수정하는 노력을 하여 왔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들 다양한 연구결과들이 찾아낸 우리사회 국가의 특징, 특히 마르스크주의적인 토대와 상부구조간의 관계에서 벗어난 모습들을 단순히 그들이 채택한 이론의 잔여범주로서 취급하였을 뿐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보는 시도는 아직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첫째, 기존의 연구결과에서 발견된 토대에 조응하지 않는 우리사회 국가의 특징을 나름대로 요약 정리하여 보고, 둘째 이러한 특징들을 함께 묶어 체계화하여 볼 수 있는 이론적 대안으로서 베버 (Weber)의 동양사회의 지배양식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이에 따른 문제점과 앞으로의 연구방향을 논의해 보려 한다.

Ⅱ. 토대와 상부구조의 비조응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이 고전적 자본주의 발전과정과는 상당한 질적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의 <창비 1987>의 한국사회성격에 관한 좌담에서 잘 드러나 있다. 특히 한국국가의 성격을 파악하는 문제에 관해 윤소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인식틀을 보편적인 것으로 공유하자라고 했었는데 토대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상부구조, 말하자면 민족국가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적어도 작업가설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상부구조, 즉 민족국가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유형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국가성격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정통마르크스주의 입장으로부터는 상당히 후퇴한 것이며, 이는 물론 그동안의 축적된 연구결과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통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후퇴를 가져오게 한 우리사회 국가의 특징들은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이대근은 그의 <주변부자본주의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과 같은 저개발사회가 선진국 독점자본의 광범한 진출과 더불어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했다고 할 때, 그 속에서 끊임없이 활개치는 저개발형 군부독재, 개발독재 또는 관료적 권위주의형 체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정치권력구조에서만이 아니라 기타 사회, 교육, 종교, 문화적 여러 측면에서도 서구적 제도나 가치관의 정립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음은 또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

동양 家父長的권위가 사회통제를 강화
서양 봉건제... 사회경쟁을 구조적 수용

즉 그는 우리 사회의 국가권력의 성격이 서구적 의회민주주의 제도의 특징과는 전혀 다름을 지적하고 상부구조와 토대의 비조응을 밝히고 있다.
이대근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상진, 최장집, 임현진등에 의해 우리 사회 국가권력의 특징을 서구의 경험이 아닌 제 3세계의 역사적 경험(특히 남미나 동남아시아)에 기초한 이론적 모델을 도입해 설명해 보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들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 각 이론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과는 일정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상진은 우리 사회에서 관료적 권위주의국가의 형성배경에는 규범적 유교문화, 중앙집권화된 관료제와 식민통치 등의 '심층유산'이 특수하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최장집은 식민통치가 끝난 후 우리 사회는 지배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힘의 공백 혹은 균형상태를 보여 주었으며 이때 외부적으로 강요된 분단상황 때문에 급속히 국가기구가 팽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남미와 구분되는 한국의 특수한 국가와 노동간의 관계를 구조화 시킨 4가지 변수로서 높은 정도의 국가관료화와 지배계급의 응집성, 낮은 정도의 사회적 양극화, 수출지향, 노동집약적 산업화 정책, 그리고 문화적 전통을 들었다.
임현진 또한 남미와 구별되는 한국의 종속적 발전과정은 국가가 해외자본 보다는 국내 자본과의 제휴를 통해 자본축적을 이룩하였고, 그 결과 탈절과 배제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현대적 권위주의'의 성립을 가져왔다고 설명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이 현대적 권위주의는 조선왕조시대의 유교적 정치윤리와 일제 강점 아래의 전체주의적 지배이념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권위주의 요소들에 의해 보강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 연고주의, 출세주의, 업적주의에 의해 고도로 응집된… 독자성을 갖는 집단이 국가기구를 관장하면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경제성장과 정치안정을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하면 우리 사회의 국가권력의 특징은 그 경제적 토대와의 관련성 만에 의해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특수한 우리사회의 전통적 요소가 뿌리 깊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으로 요약된다고 하겠다. 말을 바꾸면 자본주의적 경제기반의 사회적 관계, 즉 계급구조에 의한 국가권력의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며, 이와는 독립적으로 전통사회로부터 물려 받은 국가권력의 특징을 역사 속에서 찾아냄으로써만 우리 사회 국가의 성격이 보다 분명히 밝혀질 수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 국가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계급구조중심의 해석에 덧붙여 이와는 독립적인 새로운 차원의 문제의식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 우리 전통사회의 지배 양식에 대한 체계적 이해와 직결된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 사회가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적 계급구조를 심화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부구조는 이에 조응한 서구적 의회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변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사회의 권위주의적 요소가 변용된 모습으로 뿌리 깊이 남아 있는 모습이 이해 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Ⅲ. 동양사회구조에 관한 베버의 개념틀

베버는 그의 노작은 <경제와 사회>에서 전근대 사회의 두 가지 지배유형을 이념형으로 제시하였다. 그 하나는 서구의 경험으로부터 추출한 봉건적 (feudal)지배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의 경험으로 추출한 가부장적(patrimonial)지배양식이다.
가부장제는 통치자와 그의 신하 사이의 관계가 아버지의 권위와 이에 대한 지식의 의존에 기초하여 통치자의 가정이 확대된 형태의 지배조직인 반면, 봉건제는 통치자와 그의 신하 사이의 관계가 기사도적 군사주의에 바탕 하여 계약으로 고정된 충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배조직이다. 가부장제의 신하(staff)들은 통치자의 지배행정을 돕는 개인적 보조자 이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는 항상 통치자의 호의에 의존해야 하고 또한 통치자의 자의적인 요구에 따라야만 한다. 따라서 이 지배조직에서는 특정한 지위집단의 관직에 대한 독점의 시도가 항상 개인적으로 통치자에게 의존적인 인물들을 관직에 임명함으로써 거세된다.
그렇지만 봉건제에서는 통치자의 신하들은 대부분 통치자의 영광이 그들의 영광임을 의심치 않는 충성심으로 충만한 군인들로써 구성된다. 그들에게는 군주의 이익이 곧 그들의 이익이었으므로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무기를 갖추고 싸움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봉신의 특징인 이러한 군사적 직업성은 그들 사이에 명예를 존중하는 관습을 가져왔고 또한 군주와 신하 사이에 호혜적인 권리와 의무의 계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두 지배유형의 차이점은 지배자가 그의 신하들에 대해 보수를 지급하는 방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가부장제에서는 봉록(prebend or benefit)을 주었는데 이는 신하의 봉사에 대한 보수로서 신하가 그의 관직을 지키고 있을 때만 주어지며 다음 세대로는 전수될 수 없고 그가 죽으면 통치자에게 반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봉건제에서는 봉토(fief)를 주었는데 이는 원칙적으로는 통치자와 신하 사이에 봉건적 주신관계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만 그 신하의 개인적 재산이 될 수 있었지만 봉신의 충성을 계속적으로 또한 긴밀하게 확보할 목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대부분 한번 주어지면 다시 돌려 받기가 힘들고 다음 세대로 그 권리가 전승되어 다시 봉건적 주신관계를 지속시키는데 이바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베버의 지배양식에 따른 사회구조의 유형화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서구에서는 봉토의 전유, 지배자와 신하 사이의 호혜적 계약관계, 그리고 기사도 정신에 따른 군인집단의 명예심 등을 통해 지방분권적인 사회구조가 발생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통치자에 대해 독립적인 힘과 부를 축적하는 토지 계급의 등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즉, 봉건제는 사회집단간의 경쟁을 구조적으로 허용하는 지배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표현하면 봉건제에는 계급투쟁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동양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의 횡포가 지방분권적 구조화를 가로막고 중앙집권적인 사회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렇지만 가부장제의 통치자도 그의 가신들과의 권력투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배자의 통치영역이 그의 직접적 통제범위를 넘어 확대됨에 따라 그도 행정관료집단을 양성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 관료집단의 필요성은 지배자를 특별한 곤경에 몰아넣었다. 즉 이들이 없으면 이 지배체제는 해체될 것이고 이들을 용인한다면 통치자의 지고의 권위가 위협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만약 이들 행정관료들이 집단적으로 통치자의 개인적 가신들로부터 충성을 확보해 버리면 통치자의 권위가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과 분권화를 막기 위하여 가부장제의 통치자는 그들의 신하에게 부여하는 특권을 단지 그가 강요하는 의무를 수행할 때에만 부여하였다. 따라서 앞에서 보았듯이 봉토(fief)가 아니고 봉록(prebend)이 그 보상의 주요 방법이었다. 가부장적 관료의 특권은 항상 지배자의 신임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봉건제의 경우와는 달리 안정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가부장제적 지배양식은 독립적인 권력과 부의 축적의 가능성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배양식에서는 상비군, 영주, 부르주아등의 집단이 자생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었다.
만약 이러한 집단의 역할이 필요한 경우에는 지배자가 이들을 가부장제 관료집단의 통제하에 강제로 조직하였다. 즉 이 지배양식에는 단지 하나의 전지전능한 사회집단 즉 가부장적 관료집단만이 존재하였는데 그들 스스로는 통치자에 대항하여 단결하려는 노력을 할 수 없었고 또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관료집단은 그들의 특권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지배자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개별적으로 노력하였고, 이는 그들 사이에 엄청난 개인적 경쟁의 압력이 항상 작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Ⅳ. 맺는말
우리 전통사회의 구조가 베버가 제시하는 가부장적 지배의 이념형과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오직 구체적인 연구결과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찍이 발달한 중앙집권화된 관료제의 영향으로 지방분권적인 사회구조가 형성되지 못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세력, 혹은 집단간의 자유로운 경쟁을 용인하지 못하는 관료엘리트 중심의 하향적 사회통제구조가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은 현대한국사회의 국가권력 혹은 정치에서 뿌리깊게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의 권위주의적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베버의 개념틀이 유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국가론 연구의 과제는 전통사회구조의 보다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것이 종속적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계급구조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속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