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4)] 김성수 그는 누구인가?
 
근대 교육ㆍ언론ㆍ기업 육성한 문화 민족주의자
문맹타파 위해 한글 캠페인 … 보성전문을 고등교육기관으로 키워
 
▲ 인촌 김성수(왼쪽)와 장덕수.
김성수는 1891년 전라북도 인촌리에서 김경중과 그의 부인 고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울산 김씨 가문의 비변랑공파(備邊郞公派)에 속한다. 1893년 상속시킬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가 됨으로써 김성수는 양쪽 집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다양한 근대화 사업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1903년 13살이 되던 해에 김성수는 고정주의 딸이자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그의 장인 고정주는 장흥 고씨로서 전라도 창평군(현 담양)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특히 김성수가 1906년 16살이 되는 해에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다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창흥의숙에 머무르는 동안 김성수는 평생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생부와 양부 그리고 장인까지가 모두 유명한 지주였을 뿐 아니라 학자이자 계몽운동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이후 김성수가 추진한 조국 근대화 사업의 기본적인 방향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교육에 관한 김성수의 생각은 그의 장인으로부터 최초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18세가 되던 해에 김성수는 친구 송진우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조선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병합되던 1910년 4월 그들은 와세다대학 예과 과정에 입학하였다. 일본 유학을 통해 김성수는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많은 한국 유학생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송진우는 물론이고 장덕수, 현상윤, 김준연, 양원모, 최두선, 이강현 등은 평생의 친구로서 학교, 신문사, 방직공장 등의 근대화 사업에 큰 도움을 준 인재들이었다.

일본 유학의 경험은 김성수에게 근대교육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불어넣었다. 유학 중 그는 생부와 양부를 초청해 함께 일본을 둘러보면서 공부를 마치면 한국의 교육사업에 헌신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일본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교육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일본의 교육제도를 따라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김성수의 교육에 대한 의지는 24세가 되던 1914년 7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1914년 가을 그는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 총독부에서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때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중앙학회는 여러 지역 단위의 학회를 통합하여 백성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교육을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민족주의 학회였다. 그러나 중앙학교는 설립 이후 재정상태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김성수의 인수 후 중앙학교는 민족주의와 반일정신을 증진시키는 교육적 사명 아래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발전해 갔고 지금은 중앙 중·고등학교가 되어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에 기여하고 있다.

김성수가 근대적 사업가로 변신하는 계기 역시 그의 민족주의적 교육 이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성수는 중앙학교 학생에게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도록 하면서부터 품질 좋은 한국의 직물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산업, 특히 의류와 직물 및 섬유산업의 생산품을 위한 시장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경성직류주식회사를 인수하여 경성방직으로 전환시키면서 기업인으로 변모하게 된다. 경성방직은 순수한 한국인 자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대규모 기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민족주의적 교육이념은 언론활동으로도 확장되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의 시작이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 변화로 인해 한글로 된 한국인 소유의 신문 출간이 가능해졌다. 평소 신문사 설립에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금지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김성수에게는 좋은 기회였고, 마침내 동아일보가 설립되었다.

▲ 고려대 본관 앞에 세워진 인촌 김성수 동상.
그러나 신문사 운영은 재원 부족과 총독부의 감시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총독부의 강력한 통제와 감시로 인해 동아일보는 수많은 삭제, 판매 및 배포 금지, 압류, 보도 금지, 그리고 정간 등의 조치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문화민족주의 운동의 매체로서 그 역할을 꾸준히 담당해 나갔다.

동아일보는 문맹(文盲)타파를 위한 범민족적 캠페인을 벌이기로 하고, 300여곳의 신문사 보급소를 동원하여 포스터를 발행하고 상금을 걸어 문맹타파를 촉구하는 노래도 공모하였다. 또한 조선어학회와 함께 한글운동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는 여러 차례 사설을 통해 약화되어 가던 물산장려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피고자 하였다.

김성수는 중등학교를 성공적으로 인수 및 확장하여 효과적으로 운영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등교육이 한국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그는 한국의 고등교육기관 중 가장 오래된 사립학교의 하나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근대화의 거점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그는 보성전문학교가 자신의 마지막 사업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 어떤 다른 사업보다도 강한 집착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인수 당시 전문학교였던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미 군정청이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었다. 근대 한국의 고등교육기관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유명한 대학 중의 하나인 고려대학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렇듯 그의 1차적 관심은 문화사업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김성수는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절친한 친구인 송진우가 1945년 12월 암살되면서 어쩔 수 없이 김성수는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생활은 그에게 큰 부담과 병고를 안겨주었다.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은 김성수가 평소 앓던 지병을 악화시켜 결국에는 1955년 2월 18일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하였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ㆍ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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