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4)] 김성수, 한민당 당수로 첫 총선에 참여
 
연합야당인 민국당 창당해 개헌 시도…민주화의 정치적 초석 놓아
 
▲ 인촌 김성수
문화민족주의자로서 김성수(金性洙)는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교육(중앙 중·고등학교 및 고려대학교), 기업(경성방직), 언론(동아일보) 등의 영역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해방 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김성수는 정치적 지도자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 창당되었을 때 김성수는 당을 정신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지만 당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정치에 관해서는 지기(知己)인 송진우(宋鎭禹)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민당의 지도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탁통치를 채택했다. 신탁통치 발표는 국민 모두의 격렬한 분노와 저항을 촉발시키면서 전국적인 반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합법적인 반탁운동의 전개를 주장했던 송진우는 “불법적인 운동도 불사해야 한다”는 김구(金九) 등과 마찰을 빚었다. 한편 소련의 지시를 받고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공산주의 진영 또한 송진우를 적대시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송진우는 1945년 12월 30일 아침 56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암살당한다. 송진우의 암살은 불가피하게 김성수로 하여금 한민당의 수뇌 역할을 떠맡도록 하였다.

여러 차례 회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가 소련 측의 반대로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상정했다. 그 결과 ‘UN 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하에 한국에서 총선거를 치른다’는 내용이 의결되었다. 그러나 UN임시위원단은 소련의 반대로 인해 북한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1948년 2월 UN총회 임시위원회는 임시위원단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의 실시를 공식적으로 허가하였다. 이는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된다는 의미였다.

▲ 김성수 부통령(왼쪽)이 이승만 대통령과 대화 중 웃고 있다.

선거와 통일문제를 놓고 한국의 여러 지도자들은 또다시 견해의 차이를 보이며 대립하고 있었다. 김성수는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소련이 북한 입국을 거부한다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구와 김규식(金奎植)은 “남북간에 대화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남북간의 직접 대화를 강조했던 세력이 선거 참여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결국 1948년 5월 10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었다. 북한 지역에 할당된 100석은 공석이 되었고 200명의 국회의원이 남한 유권자에 의해 선출되었다. 8월 15일 건국을 위한 마지막 디딤돌인 제헌의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의장이 국회의 의석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김성수는 새로 구성될 국회의 의원직에 출마하지 않았다. 김성수가 출마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조선민주당 부의장 이윤영(李允榮)이 김성수의 지역구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민주당은 조만식(曺晩植)에 의해 설립된 당인데, 김성수는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에 대한 존경과 배려의 의미로 그의 지역구를 이윤영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총선거 결과 국회의원 의석 분포는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 김성수의 한민당이 29석, 이청천(李靑天)의 대동청년단이 12석, 이범석(李範奭)의 조선민족청년단이 6석, 군소 정당 13석, 그리고 무소속이 85석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한민당에 상당히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정당의 명의로 출마하여 당선한 한민당 계열 사람까지 고려한다면 한민당은 국회에 사실상 84석의 의원을 확보한 셈이라는 계산도 가능하다. 실제로 당시 선출된 많은 국회의원은 한민당 지도자들이 입각할 것을 기대하면서 내심 한민당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선거 후 ‘이승만이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 가고 있었다. 한민당의 영향력 그리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데 한민당이 기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승만은 김성수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하고 한민당 의원들은 각료 구성에서 모두 배제했다.

▲ 1947년 2월21일 한민당 김성수 당수(오른쪽)가 AP도쿄 지국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민당 지도부는 이승만이 김성수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김성수 자신도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김성수와 한민당 지도부는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다. 결국 김성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되는 순간 축하행사 단상에 야당의 당수로서 앉아 있었다.

갈수록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해 나가는 이승만을 견제하고, 당의 지지기반을 넓혀 당세를 확장하기 위해 김성수는 1949년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그것은 김성수의 한민당, 신익희(申翼熙)의 대한국민당, 이청천의 대동청년단의 연합이었다. 연합을 통한 민국당의 창당은 의원수의 분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민국당이 70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수를 보유하게 되었고, 나머지 130석은 무소속을 포함한 다른 4개 정파가 분점하게 되었다.

거대 야당으로서 민국당은 이승만 정부의 권력에 도전하였다. 1950년 1월 20일 민국당은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자’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이승만은 강력한 개헌 반대 캠페인을 시작했다. 1950년 3월 14일 시행된 최종 투표의 결과는 참석한 179명 가운데 79명만이 개헌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가 33명, 기권 66명, 무효표가 하나였다. 이는 헌법개정을 위해 민국당이 기대했던 144표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패배가 민국당에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반면 이승만에게는 승리의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민국당의 개헌 시도 이후 이승만은 국회와 비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민국당이 제안한 개헌투표가 실시되기 전에 이승만은 “2대 국회의원 선거를 1950년 5월 10일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개헌투표 승리 후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모호한 입장으로 다시 선회하였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할 것”이라는 경고를 듣고서야 이승만은 5월 30일을 선거일로 공포하였다.



결국 선거는 1950년 5월 30일 실시되었다. 이번에도 김성수는 그의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민국당이 제 궤도를 잡는다면 곧바로 정계를 은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결과는 김성수와 민국당에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민국당은 이승만의 여당과 같이 24석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에 반해 126명의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어 이들이 다수를 형성하였다.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윤기섭, 장건상 등 중립이나 온건파의 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처럼 잡다한 국회의 의원 구성은 국회에 대한 전망을 불확실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향후 정치가 격동에 휩싸일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한국정치를 철저하게 요리해 나갔다. 국회를 무시하는 경향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일찌감치 드러났지만 그의 독선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점점 더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부통령이던 이시영(李始榮)이 대통령 측근의 부정사건에 격분하여 사임하면서 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이 자리에 김성수가 추대되었지만 그는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대통령제하에서 부통령직은 대통령의 유고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에 김성수는 마지못해 부통령직을 수락하고 1951년 5월 18일 국회에서 수락연설을 하였다.

▲ 인촌 김성수 선생 21주기 추념식 모습.

이승만과의 의견 차이는 결국 이승만과 김성수의 짧은 동거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1951년 6월 26일 주일 한국대사 임명에 관한 각료회의에서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거창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신성모를 주일대사로 임명하고자 하였다. 김성수는 “두 사건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주일대사로 임명되어 한국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각료회의를 무시한 채 신성모를 임명하고 말았다. 이승만의 횡포에 극도로 분개한 나머지 김성수는 그만 병이 악화되어 얼굴에 부분적인 마비증상을 보였다. 며칠 후 결국 김성수의 오른팔은 마비증상으로 거동이 불편해졌으며 언어 능력에도 장애가 왔다. 김성수가 투병하고 있는 동안 이승만은 그의 권력기반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이를 보다 못한 김성수는 결국 1952년 5월 29일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승만의 독재를 비난하는 장문의 사직서가 국회에서 낭독되었다. 김성수의 사직은 1952년 6월 28일에 공식적으로 수리되었다. 이승만의 독단적인 통치에 맞서 반(反) 이승만파를 규합하려는 김성수의 노력은 1955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당 창당을 위한 노력의 결과를 보지 못한 채 김성수는 1955년 2월 18일 운명했다.

그의 사망 7개월 후인 9월 19일에서야 비로소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오늘날의 많은 정치지도자 중에서도 전직 대통령 김영삼(金泳三)과 김대중(金大中)은 김성수가 창당하려고 했던 민주당의 후예들이다. 김성수는 부통령보다는 이승만의 독재와 독선에 저항한 야당지도자로서 전후 한국정치에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민주화의 정치적 초석을 만든 이가 바로 김성수이기 때문이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ㆍ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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